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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너희는 / 엡 2:19-22 (신 312쪽)

오늘 본문의 제목이 “너희는” 입니다만, 

이건 본문에서 그렇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고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고 하면 “우리는” 입니다. 

우리의 존재, 우리의 본질에 대해서 생각을 해봐야만 하는 내용이 본문에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아예 3인칭으로 “이방인”이라고 하면 좀 더 확실한 제목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너희”라고 하는 칭호를 받는 사람들이 다 에베소 교인인데 

이들은 지금 에베소서에서 유대인과 자주 대조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우리도 다 사실은 이방인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 이방인의 정체성, 즉 Identity 에 대해서 사도 바울이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오늘은 우선 본문에 나오는 하나하나의 정의보다는 

일반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방인들에 대한 정의를 한 번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도대체 너희는, 또 우리는, 아니 이방인은 어떤 존재일까 하는 겁니다. 

물론 성경에 나타나고 있는 말씀을 통해서 그 정체성에 대한 개념을 확립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왜 이스라엘의 종교를 믿느냐고 하는 세상의 비판에 대해서 

어느 정도 대답을 할 수 있는 정도는 되어야 합니다. 

아니 남과의 문제가 아니라 최소한 내 자신 스스로가 

내가 가진 믿음에 대해서 의심 하지 않는 수준은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하는 말에 대해서 오해하기를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우리를 향하신 사랑과 

우리가 바라는 하나님의 사랑에 있어서 약간의 간격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기껏 잘한다고 하는 사람들도 가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회의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특별히 개인적인 어떤 아픔과 상처를 당하면 그것이 아주 심하게 노출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쉽게 이야기를 해서 남의 문제일 때는 별 감정 없이 믿음으로 살자고 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문제가 되면 아주 심각해지는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자녀가 대학에 떨어졌다고 교회를 옮겨 버린다든가, 

장로 피택 선거에 떨어져서 교회 출석을 거부하든지, 

사업이 실패했다고 교회의 모든 활동까지 다 접어버리든지 하는 문제들입니다. 


이런 것들이 모두 

우리를 그리스도인이라고 하고,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고 하는 내 존재의 본질에 대해서 

도무지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결과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9절에도 분명하게 나와 있지 않습니까?


19절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그동안 자주 드린 말씀이지만 

성경에 나오는 “그러므로” 라고 하는 단어에 대해서 중요하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어야만 합니다. 

에베소서에서 지금까지 이야기하고 있는 내용의 결론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그러므로 앞에 나오는 문장과 그 뒤에 나오는 문장이 

얼마나 일치하는지를 확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에베소서 2장 19절에 나오는 그러므로를 통해서 

전후 나오는 모든 내용과 결론이 일치하는 가장 중요한 핵심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오늘 본문의 제목인 “너희는” 의 정의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여기서 한 번 생각해 볼 것은 

여태 말씀드려온 에베소서 1장 1절부터 2장 18절까지의 말씀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아멘으로 화답하겠습니까? 


따지고 들면 모든 말씀에 대해서 아멘 해야 옳습니다. 

그렇죠? 


그렇다면 오늘의 말씀에 대해서 결론은 아멘으로 순종을 해야만 옳은 겁니다. 

그러니까 이미 다 결론은 내려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면 이미 내려진 모든 결론에 대해서 

내 삶을 통해서 비춰보면 아직도 아니더라는 겁니다. 

너희는 이렇다라고 말씀을 하셨는데 아직 우리는 그렇지 못하더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라고 하는 단어가 쉽게 적용이 되지 않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대한 정체성과 본질이 자꾸만 흐려지고 말더라는 겁니다. 


아니 이 문제는 오늘 저녁에도 계속 되고 있는 의문이라는 겁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별의별 말씀을 다 하셔서 

우리의 존재를 규정하고, 

정체성에 대해서 확실하게 말씀을 하셨어도 

도무지 우리는 그런 걸 못 느끼겠더라는 겁니다.


왜 우리는 지금 19절에 말씀하고 있는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라는 소리보다, 

하나님의 권속이라고 하는 말보다 그냥 

건물 월세 오르지 않는다는 소리가 더 좋다는 겁니다. 

남편이 돈을 더 많이 벌어오는 것이 훨씬 더 좋다는 겁니다. 

카드 값을 막게 해주는 것이 훨씬 더 좋다는 겁니다. 

자녀들이 공부 잘하고, 건강하고 씩씩하고, 돈 안 들여도 잘 크는 것이 더 좋다는 겁니다. 


아니 

하나님을 섬기고 사는 우리들한테 그 정도는 해주셔야만 하지 않느냐는 것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불만이요, 소원입니다. 

그렇죠? 


어렵게 개척교회를 운영하는 데 그 정성을 봐서라도 

이 안에 성도들을 가득하게 채워주셔야만 한다는 겁니다. 

같이 예배드리고, 

모여 기도하고, 

성경공부 하는 거 등등 다 받으셔서 

뭔가 확실하게 부흥하는 모습이 나타나야 한다는 겁니다. 


그것이 오늘 “너희는” 이라고 부르면서 

우리에 대한 이런저런 정의를 내리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고 하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자 그렇다면 오늘 우리들의 이런 시각과 가치를 어떻게 해야만 할까요? 

하나님의 우리 정체성과 본질에 대한 정의를 도대체 무엇으로 극복해가야만 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분명히 다른 것 같은데 도대체 누가 바꿔야만 합니까? 


사실 해답은 이미 나와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그 해답에 대해서 확신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어려울 뿐입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택한 자녀로서 이 세상을 잠간 사는 겁니다. 

문제는 이 세상을 사는 그 잠간의 시간을 영원하다는 착각을 가지고 있는 겁니다. 

너무 이곳의 삶에 대해서 목을 매고 삽니다. 

여기가 아직 종점이 아닌데 종점이라는 착각에 빠져서 있는 대로 즐기고 보자는 것은 아닌지 모릅니다.


왜 우리가 오늘의 현실에 자꾸만 빠져듭니까?

이웃나라 일본의 현실을 객관적으로 잘 보세요. 

그리고 거기에 반응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모습을 보세요. 

일본이나 우리나라나 사실 오늘, 여기, 지금 이 세상 밖에 없는 것 같은 그런 모습입니다. 

어디로 피하면 어떻고, 무엇을 먹으면 어떻습니까? 

어차피 다 짧은 한 세상 사는 겁니다. 

왜들 이렇게 가볍게 야단법석인지 모릅니다. 

저는 그렇게 야단을 하는 사람들 중에 예수 믿고 사는 성도들은 또 얼마일까를 생각해봅니다. 

일본산 기저귀, 분유, 소금이 없을까봐서 사재기를 하는 사람들 중에는 

제발 하늘 영광을 소망하면서 사는 그리스도인은 없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아니 최소한 우리 나무목교회의 성도들은 그런 모습 보이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차피 잠간 사는 세상입니다. 

이 잠간 사는 세상 중에서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 자랑이 되고 영광이 되는 성도로 사는 겁니다. 

하나님도 모르고, 

천국도 모르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뭔지 모르는 

세상 사람들처럼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세상 한 번 살면 

더 이상의 보장이 없고, 

미래가 없고, 

소망이 없으니까 

오로지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다 걸고 사는 겁니다. 

여기가 지금 저들에게는 시작이요, 끝입니다. 

이 세상이 저들에게는 전부 다입니다. 

그러니까 아무 것도 내놓지 못하고, 

조금이라도 더 움켜쥐고 살려고 하는 겁니다.



그러나 너희는 절대 안 그렇다는 겁니다. 

예수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유대인들과 같은 조건과 처지가 된 우리는 안 그렇다는 겁니다. 


똑같이 지금의 이 세상을 사니까 

지금은 구분이 안 되고, 

오히려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훨씬 더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살지만 

결국에 가서는 달라지는 겁니다. 


왜죠? 

하나 뿐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신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만드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늘 영광의 보좌에 찬양을 드리기에 어울리는, 

하늘나라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 수 있는 

하나님의 작품으로 만들어 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후 9:8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빌 1:6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나를 보면 그럴 가능성이 조금도 안 보이는 것입니다. 

오늘의 내 현실을 보면 전혀 뜬금없는 그저 희망사항일 뿐입니다. 

때문에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자꾸만 의심이 생기고, 답답하고 억울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예수 믿지 않는 불신자들보다 

훨씬 더 못한 대우를 받고 있는 것 같은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아직 본 게임은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모든 과정의 결과는 아직 나오지 않았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 우리의 환경과 형편과 처지가 

세상 속에서 조금 뒤처지고 연약해 보인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의 생각과 느낌일 뿐입니다.


오늘 “너희는” 이라고 말씀하는 모든 호칭의 결론은 결국

너희는 하나님께서 직접 책임지시는 존재가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너희를 책임지시는 그 하나님께 대한 개념과 생각을 제대로 세우고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알라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결국 나를 책임지시는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의 형편과 처지의 해결책을 찾는 것이 우선이 아니라 

나를 책임지시는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것이 우선입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알아야만 

우리는 오늘의 처지와 환경과 형편에 대해서 용기를 가질 수 있습니다. 

담대해질 수 있습니다. 

자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내 존재의 본질과 정체성은 결국 

나를 만드신 하나님을 제대로 알아야만 올바르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마 6:30-34절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앞에는 

우리가 들풀보다, 새보다, 백합화보다 더 귀한 존재입니다. 

다 먹이시고, 다 입히시고, 다 채워주십니다. 

우리의 그 하나님을 제대로 잘 아시기 바랍니다. 

출처 : 나무목교회
글쓴이 : 뜨거운얼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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