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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하나님의 권속 / 엡 2:19-22 (신 312쪽)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있는 가장 큰 전제는 

우리가 현재 받아 가지고 있는 영적인 권세, 또는 위치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씀을 드리자면 오늘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제발 좀 알고 살라는 겁니다. 

내가 주 안에서 어떤 존재인지를 제대로 알면 

오늘 내가 처한 현실에서 오는 모든 부담감과 짐을 이길 수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교회의 지체로서 가지고 있는 신분에 대해서 

정확하게 설명을 해주고 그 신분에 합당한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를 이야기하는 것이 

곧 신약성경 전체의 변함없는 스토리입니다.


본문을 통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사도 바울의 이야기도 결국 같은 의미입니다. 

예수 믿고 사는 성도인 우리의 위치를 제대로 이해를 하고 있으라는 겁니다. 

지난주에는 우리의 위치가 성도와 동일한 시민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다음 오늘은 우리를 가리켜 “하나님의 권속”이라고 말씀을 합니다. 

사실 권속이라고 하는 단어는 현대에는 좀 생소한 표현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권속이라고 하는 단어의 의미가 축소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도 권속은 강조되고 있습니다. 

권속을 다른 말로 하자면 가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가장 최초로 허락하신 공동체가 가정입니다. 

가정이라는 공동체를 제일 처음 만드실 만큼 하나님은 가정을 중요하게 여기셨다는 겁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시는 가정의 구성원이 바로 권속, 즉 가족입니다. 

그러니 어쨌든지 간에 가정의 핵심은 바로 가족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가정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이루고 가지는 하나님의 권속, 즉 하나님의 가정입니다. 

가족이라고 하는 가정의 핵심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갖게 되는 가장 기본적인 조건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인격적인 관계라는 것입니다. 


가정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가정은 가정의 구성원들인 가족들 사이의 인격적인 관계입니다. 

인격적이라고 하는 것은 도덕적, 윤리적 차원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출생에 관한 것이고, 소속에 관한 것입니다. 

가족은 혈연이라고 하는 끈에 의해서 가정의 구성원으로 이어집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이 주장했던 것이 바로 이 혈연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혈연이 아니더라도 소속했다는 것만으로도 가족이 되기도 합니다. 


이것이 바로 지금 에베소서를 통해서 

사도 바울이 이야기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가정, 

하나님의 가족, 

하나님의 권속이라고 하는 겁니다. 


우리는 비록 혈연으로는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은혜를 얻은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얻은 이 자격은 그 어떤 경우에도 취소되거나 사라지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결코 차별대우를 받지 않습니다. 

똑같은 위치에서, 

똑같은 자격으로, 

똑같이 대우를 받습니다. 

어떤 대우를 받는지 18절에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18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겁니다. 

우리가 지금 그냥 교회에 와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 온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하나님 아버지 앞에 나오고, 

하나님 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영광을 누리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영광을 잘 모르고, 또한 누리지도 못합니다. 

솔직히 말로는 다 누린다고 하는데 그 삶을 가만 보면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아니 하나님이 아버지가 된 이 놀라운 특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 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를 단순히 자기가 경험하고 이해하는 한계 안에서의 아버지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자기가 아는 인간적인 아버지와 하나님 아버지를 동일시하고 있는 겁니다. 


사실 우리나라 사람은 아버지에 대한 상처를 많이 갖고 있습니다. 

가부장적인 권위와 유교적인 문화의 악영향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에 대한 생각이 부정적입니다. 

밤낮없이 술만 마시고, 

싸우고 욕 하고, 도박에, 여자문제에 언제든지 부정적인 모습만 보입니다. 


아버지에 대한 그런 생각을 하나님과의 관계에까지 넓혀서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아버지 하나님께 대한 큰 바람이 없습니다. 

그저 오늘 내 삶에 대해서 방해나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예수 믿고 사는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지게 되는 가장 큰 혼란은

‘나는 열심히 예수를 믿고 사는데 결과를 보면 꼭 그렇게 잘 되는 것 같지는 않더라.’는 것입니다. 

내가 열심히 하는 만큼의 만족할만한 결과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참아야하고, 

견뎌야하고, 

기다려야만 하는 거 다 아는데 

그렇게 할 만한 뭔가의 꼬투리 정도는 보여야 되는 거 아니냐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가 듣기에도 분명히 맞는 말씀을 하는 설교임에도 불구하고 

실제의 삶속에서는 슬그머니 거부하게 된다는 겁니다. 

말씀하신 그대로 순종 하고 살면 

정말 아버지 하나님이 간섭하셔서 뭔가 이루어질 것 같은 생각이 안 드는 겁니다. 

말씀은 그저 언제든지 나하고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남의 일 일뿐입니다. 

그래서 내 집을 살면서도 

내 집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오늘의 성도들에게 있습니다.


여행을 다녀보면 제일 많이 느끼는 감정이 무엇입니까? 

그래도 역시 내 집이 최고고, 내 집 밥이 제일 맛이 있다는 겁니다. 

아무리 별 다섯 개짜리 호텔에서 잠을 자고, 

최고급 뷔페에서 식사를 해도 그게 그저 며칠이니까 좋은 거지, 

계속해서 그렇게 살라고 하면 결코 그렇게 못 산다는 겁니다. 

그래도 뭐니뭐니해도 삐그덕 삐그덕 대는 소리 나는 내 집 침대가 더 좋고, 

늘 그 반찬이 그 반찬인 내 집 밥이 제일 맛이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기쁨을 평소에는 잘 못 느낍니다. 

아무 일 없이 늘 그저 그런 날 같으면 절대로 느끼지 못하는 것이 우리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제 좀 고생해보면 생각이 나고 그리워지고, 

그 때 가서야 이제 겨우 감사한 줄 아는 겁니다. 


큰 아들이 논산 훈련소로 입대하던 날, 

긴장을 해서 그러는지 아침부터 밥을 잘 안 먹었습니다. 

그래서 같이 내려가다가 중간에 휴게소에 들러서 

이것저것 음식을 사서 먹으라고 해도 끝내 잘 안 먹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따 훈련소에 들어가서 저녁때가 되면 

지금 안 먹고 온 것을 정말 후회하게 된다고 그랬습니다. 

그래도 뭐 별로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러더니 나중에 첫 면회를 가니까 

훈련소에 들어간 날 저녁에 

집에서부터 아무 것도 안 먹고 온 것을 정말 후회했다는 소리를 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닐 때는 잘 모릅니다. 

지금 내가 교회를 다니고 있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를 정말 모릅니다. 

그런데 다니기 힘들 때가 되면 그때 서야 알게 됩니다. 


군대 신병훈련소의 교회에 처음 가서 예배를 드리는 날, 

얼마나 많은 신병들이 정말 뜨겁게 우는지 모릅니다. 

저도 역시 많이 울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건강하게 제대를 하면 

이제 정말 교회를 열심히 다니겠다고 그렇게 다짐을 했습니다. 

그러나 작대기 두 개의 계급장만 달면 내가 언제 그런 다짐했는지 생각도 나질 않습니다.


그런데 성도의 성도다움이 어디에서 표현이 됩니까? 

예배당에 나오는 것입니다. 

교회를 다니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교회는 다니려고 하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지지고 볶고 싸우더라도 교회에 와서 싸우려고 합니다. 


사실 교회 안에서 성도가 서로 싸우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그건 아주 당연한 것입니다. 

지극히 정상적인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같은 집안 식구끼리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편한 존재가 바로 식구끼리입니다. 

편하니까 서로 싸우는 겁니다. 

어떻게 싸우더라도 갈라설 수 없는 것이 식구끼리입니다. 

그러니까 싸우는 겁니다.


그러나 이웃하고는 그냥 안 보면 그만이기 때문에 싸우지 않는 겁니다. 

같은 집에 사는 것도 아니고, 

같이 다니는 것도 아니니까 아예 싸우지도 않는 겁니다. 

그냥 서로 마주치지 않고, 안 보는 것이 최선이니까 

겉으로 보기에는 싸우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겁니다. 


그러나 가족은 다릅니다. 

매일 봐야 합니다. 

싫어도 좋아도 봐야만 합니다. 

그러니까 서로 싫으면 싫다 하고 싸우고, 좋으면 좋다하고 싸우는 겁니다. 

그러니까 교회에서 싸우느냐고 하실 것 없습니다. 

교회니까 싸우는 겁니다. 

서로 식구니까 싸우는 겁니다.


물론 최근에 들어서는 교회 안에서도 서로 싸우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싸울 일이 없어서 싸우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싸울 일이 생기면 그냥 다른 교회로 옮겨 가버리니까 안 싸우는 것처럼 보이는 겁니다. 

그만큼 주변에 교회가 많은 겁니다. 

그러니까 교회 안에서 서로 싸운다고 하는 것은 

절대로 갈라서지 않을 사람들끼리 싸우는 겁니다. 

그런 면에서는 교회 안에서 서로 싸우는 것도 괜찮은 겁니다. 


옛날 어른들 말씀에 싸우면 키가 큰다고 했습니다. 

서로 싸우다보면 믿음도 자라고, 

인격도 자라고, 

이해심도 자라는 겁니다. 

그러다보면 언젠가는 싸우라고 해도 안 싸웁니다. 

그만큼 철이 나는 겁니다.


그리고 서로 가족이니까 서로 간에 흠이 좀 보여도 되는 겁니다. 

지금 예배 시간이고, 

또 여러분 들 앞에 서 있으니까 제가 이렇게 차려입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예배가 끝나면 어떻습니까? 

아주 편한 자세로 옷 입고 사는 겁니다. 

그렇게 해도 가족은 “목사님이 왜 그래?” 소리를 하지 않는 겁니다. 


좀 허물이 있더라도 그냥 넘어가는 겁니다. 

내 눈에 거슬려도 봐주는 겁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권속이 되어 사는 우리들의 자세인 것입니다.


내 눈이 기준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는 우리 중에 그 누구도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심지어는 담임목사인 저의 가치관도 기준이 아닌 것입니다. 

그것보다 훨씬 더 넓고 큰 기준이 적용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허물과 죄악을 당신의 몸에 다 지고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기준입니다. 

그 분은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당신의 십자가 안에 포함하셨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자녀요, 

권속이요, 

가정이요, 

한 식구인 교회는 이미 말 할 것도 없습니다.


뭐 지금 내게 현실적으로는 별로 이루어진 것도 없는 것 같지만 

이미 엄청난 은혜 안에 우리를 두신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삶도 그렇고, 

교회도 그렇고 

마치 별 볼일 없는 그런 모습인 것처럼 생각이 들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마치 김치찌개를 몇 번을 다시 뎁힌 것 같은 그런 맛 밖에는 없는 것일지라도 

오늘 내게 주신 교회나 가정이나 식구들, 성도들이 

내게는 가장 잘 맞는 최고의 선물인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마귀는 이 모든 행복을 

기회만 있으면 우리에게서 뺏어가려고 하는 계략을 달고 살고 있음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깨어 기도하는 겁니다. 

오늘의 이 모든 것이 내게 허락하신 최고의 선물인 것을 잊지 마시고, 

어찌하든지 서로를 사랑하고 격려하고 위로하고 배려하면서, 

아니 어쩔 때는 싸울지라도 

아름답고 행복한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권속, 

하나님의 가정으로 살아가는 나무목교회의 권속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 나무목교회
글쓴이 : 뜨거운얼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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