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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모퉁이 돌 예수 / 엡 2:20 (신 312쪽)

20절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사도 바울이 교회를 건물로 비유할 때 건물이 가져야만 하는 가장 기초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퉁이 돌은 건물의 가장 기초가 되면서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에야 철골로 건물의 기초 구조를 세우고 그 위에 콘크리트나 벽돌로 건물을 세워 갑니다. 

그러나 옛날에는 건물의 터 위에 모퉁이 돌을 기초로 세운 다음에 

그 위에 기둥을 세우고 목재나 돌로 서로 연결을 해서 건물을 지어 나가는 겁니다. 


교회라는 공동체도 역시 모퉁이 돌을 기초로 해서 세워가는 겁니다. 

그런데 그 모퉁이 돌이 그리스도 예수이십니다.


“너희는” 이라고 분명하게 우리를 복수로 표현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라는 공동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고백한 성도들인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여기서의 너희라는 표현은 교회 공동체를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다는 말씀입니다. 

교회의 기초는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교회 공동체의 성도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있다는 것은 성도 그 자신이 스스로를 죄인임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사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 죄인인 것을 아는 것입니다. 


때문에 자신의 삶을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께 맡기고 사는 겁니다. 

이 사실을 본문에 대입을 해서 좀 더 확대를 해보면 

교회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사는 죄인들의 공동체입니다. 

때문에 언제든지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기초가 되는 공동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기초가 된다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절대적인 필수입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기초로 다져져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씀을 드리자면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기초로 이미 완성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모퉁이 돌은 교회의 기초로 

이미 그 자리를 잡고 흔들리지 않는 채로 굳건하게 세워져 있습니다.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모퉁이 돌 위에 얹어진 성도들입니다.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모퉁이 돌 위에 세워지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각 자의 길을 고집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각각 자기 원하고 바라고 주장하는 스타일을 따라서 교회 공동체를 세운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각각 독자노선을 걷고 있습니다. 


사랑을 말하고,

이해를 말하고, 

포용과 배려와 섬김을 말하기는 하는데 

그것이 모두 자기 나름의 주장일 뿐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안에 들어오면 그 때서야 받겠다고 하는 겁니다. 

그냥 자기를 주장하고 나를 드러내는 것뿐입니다. 

나를 주장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기초라고 말을 하니까 정말 말도 안 되는 것입니다.


요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들이 바로 성도입니다. 

여기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은 

내가 원하고, 

내가 바라고, 

내가 꿈꾸는 나의 일을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표현이 나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을 못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하게 전제가 있습니다.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만 열매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기초가 되지 못하면 절대로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겁니다. 


이 열매가 무엇을 말하는 겁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삶을 말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열매를 그냥 내가 원하고 바라고 뜻하고 꿈꾸는 일이라고 생각을 버립니다. 

그래서 그 열매가 없는 것에 그렇게 크게 신경 쓰지 않습니다. 

마음이 아프지도 않고, 

별로 반응이 없고, 

감정도 그렇게 동하지 않습니다. 


TV드라마에서 보는 아픈 내용이나 슬픈 내용보다 더 못한 감정입니다. 

아니 아예 감정조차도 없습니다. 


내 아버지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는 것이 그렇게 크게 문제가 아닙니다. 

우선 내 삶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내 누리는 기쁨과 즐거움, 내 만족이 우선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삶의 가장 큰 문제가 뭐냐면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 삶의 기초가 아닌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기는 하는데 영락없이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 

그냥 열심을 품고 다니는 것 같지만 

늘 그냥 자기 기분과 자기 만족의 한계 내에서 움직이고 끝입니다. 

그래서 누가 보기 싫으면 그냥 다 싫고, 

누가 자기 마음에 들면 정말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원수라도 사랑하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그냥 공허한 메아리일 뿐입니다. 


최소한의 인격과 매너와 배려가 갖추어지는 그리스도인이 되어가질 않습니다. 

늘 그냥 자기 소원과 자기 행복을 위한 도구로서의 신앙생활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 실천되지도 못 하고, 

어디 가서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하는 말을 하기에도 부끄러운 모습뿐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런 자기를 스스로 보질 못하고 있는 겁니다. 

그냥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하는 말이 딱 적당한 

육신의 노예가 되어 있는 욕심 충만의 삶일 뿐입니다. 

어떻게 보면 참 안타깝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엄중한 경고의 말씀이 이미 있기 때문입니다.


마 7:16-27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열매가 이미 자신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능력이 열매가 아닙니다. 

삶이 열매입니다. 

말씀에 따라 순종하는 삶이 열매입니다. 


세상의 형편과 처지에 따르는 삶의 크기가 열매가 아닙니다.

아파트 평수, 재산 크기, 세상의 지위가 열매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고 있는 삶의 자리가 열매입니다. 

세상의 대단한 것으로 사는 것이 열매가 아닙니다. 

오대양 육대주를 내 집처럼 다니고, 

여기저기서 가장 좋은 것으로 대접을 받고, 

또 많은 사람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 것이 열매가 아닙니다. 


오늘의 삶이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이루고 있는 삶이 되는 것이 열매입니다. 

예수님의 삶을 사는 것이 곧 열매입니다. 

예수님의 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라면 당연하게 열매는 나타나는 것입니다.


빌 2:6-8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 예수님이 이미 모퉁이 돌이라고 하심은 곧 예수님의 삶은 희생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곧 섬김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낮아지심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거룩하신 하나님, 

능력의 크기가 한이 없으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삶은 

하나님의 뜻 앞에 철저하게 헌신하고 충성하고 복종하시는 삶이었습니다. 

어느 한 가지라도 더 드러내고 자랑하고 인정받으려고 하는 부분이 없으셨습니다. 

진실하게 성실하게 겸손하게 사는 삶이셨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 삶을 살지 못하는 걸까요? 

아니 솔직하게 그런 삶을 살려고 하는 마음은 갖고 있기는 있는 것일까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사는 성도의 삶은 

자기가 죄인이라고 하는 대전제가 기본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때문에 성도는 자기의 삶이 확실하지 않고, 또 견고하지 못한 것을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나를 

성도로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살 수 있는 것은 

모두가 다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아는 겁니다. 


자기를 알기 때문에 나 아닌 다른 이의 삶을 충분히 이해하고 사는 것입니다. 

다른 이에 대한 여유와 배려와 관심과 사랑을 갖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 또한 같은 형편과 처지인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나 아닌 다른 사람의 삶을 이해하고 배려하고 우선하는 삶을 살려고 하는 겁니다. 

눈에 보이는 다른 사람의 부족한 삶을 가리켜 

충분히 뭐라 할 수 있고, 

충분히 권면할 수 있고, 

충분히 야단할 수 있지만 

그 모습이 내 모습이 되는 삶을 사는 겁니다.


엡 4:31-32절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서로 친절하고 

서로 불쌍히 여기고 

서로 용서하면서 사는 것의 가장 기본은 

내가 남들보다 더 잘하는 것을 내 자랑을 삼지 않는 겁니다. 


오히려 

나를 더 깎아내고, 

나를 더 잘라내고, 

나를 더 다듬어가는 겁니다. 


나한테 남이 맞춰지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남을 더 맞춰갈 줄 아는 겁니다. 

모든 이의 관심을 나한테 돌리는 것이 아니라 

아무 관심도 받지 못하는 다른 이에게 내 관심을 보이는 것입니다. 

내가 하는 것이 옳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남에게 주장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를 주장할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여전히 나는 주 앞에 서 있는 죄인으로 사는 겁니다. 


그것이 우리 같은 죄인들을 위해서 묵묵히 십자가를 지시고 

죄인 공동체인 교회의 모퉁이 돌이 되신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사는 바른 길입니다. 

내 주변과 내 이웃의 연약함이 보이거든 그것을 내 모습으로 여기고 사시기 바랍니다. 


교회의 은혜로움과 교회다움은 그런 사랑의 맛에서 나타나는 것이고, 

그것이 곧 모퉁이 돌을 예수로 삼은 교회공동체가 드러내고 자랑할 만한 바른 모습입니다. 

최소한 우리 성도들은 남에게 짐이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남을 불편하게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세상의 것이 없더라도 우리는 섬길 것이 다 있습니다. 

어떤 자리에서도 우리 성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는 

행여 누가 나를 불편하게 하더라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는 마음으로 이해하고 넉넉하게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내 마음을 편하게 먹으려면 다들 받아들이고 사는 겁니다. 

출처 : 나무목교회
글쓴이 : 뜨거운얼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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