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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성도의 터 / 엡 2:20 (신 312쪽)

오늘 본문부터는 사도 바울이 교회를 건물로 비유하면서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에게 그들이 교회 안에서 가지게 된 

자신들의 존재에 대한 참된 본질을 가르쳐주는 내용입니다. 

한마디로 너희는 이런 존재들이라는 이야기를 해주는 것입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로 건물의 가장 기초가 되는 터에 관한 이야기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진 존재라고 하는 

그 분명한 한계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20절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터는 사실 그 위에다가 건물을 세운다고 하는 전제를 기준으로 하는 겁니다. 

어떤 건물을 세우느냐면 바로 교회라고 하는 건물을 세우는 겁니다. 

교회는 거저 세워지는 것이 아니고 바로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진 것입니다. 

또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져야만 비로소 교회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가 교회되는 기본이고, 성도가 성도 되는 기본입니다. 


그렇다면 건물을 크게 지으려면 무엇이 커야만 합니까? 

기본적으로 터가 넓어야만 합니다. 

땅이 넓어야만 그 위에 건물을 크게 지을 수 있는 겁니다. 

10평의 땅 위에 500평의 건물을 지을 수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가 곧 교회입니다. 

교회 곧 우리가 세워지는 터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라고 했습니다. 

이 터는 결국 성경 66권 전체를 말씀하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교회를 짓는 땅은 

바로 성경 66권 전체의 크기라는 말씀입니다.


엡 3:14-19절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져서 뭘 어떻게 해야만 하는 겁니까? 

굳이 교회로 부르시지 않고도 

얼마든지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실 수 있으실 텐데 

뭣 하러 교회로 부르셨을까요? 

각 자 알아서 살더라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시면 되잖습니까? 

골치 아프게 우리 각 자의 넘치는 개성들을 굳이 한 곳으로 부르시는 이유는 도대체 뭡니까?


갈 3: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가 다 차별과 구분 없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이것이야말로 

복음이 주는, 또 복음이 갖는 기본 원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못 받아들일 것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성도들이 가져야만 하는, 

쉽게 이야기해서 교회가 가져야만 하는 가장 기본 중의 기본이 

바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 하나가 되는 것에 있어서 많은 오해와 편견과 갈등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겁니다. 

분명히 교회를 세우는 기본의 터는 성경 66권 전체인데도 불구하고, 

교회를 이루면서 갖고 있는 터는 자기 한계 안에 국한하고 있는 겁니다. 

성경 전체의 시각을 가지지 못하고, 

순전히 자기 한계, 

자기 실력, 

자기 체험 안에 있는 겁니다. 

오로지 자기의 것으로 남에게 강요하는 겁니다. 

하나가 되기는 하는데 그 기준이 언제든지 자기에게만 있는 겁니다.


지금 우리가 중국집에 와있다고 생각을 하고 

자기가 먹고 싶은 메뉴 한 가지씩을 선택하기로 합시다. 

그러면 여러분은 무엇을 드실래요? 

차례대로 한 번 말씀을 해보실까요? 

사실 이런 질문은 참으로 어리석기 짝이 없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런 선택은 각 자가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미 제가 말씀을 드린 대로 중국집에 와있다고 하는 전제 자체도 틀린 겁니다. 

아예 중국집에 가지 않으시는 분도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습니까? 

중국집에 왔더라도 각 자 원하는 음식이 다 다르고, 

심지어는 중국집 자체를 가지 않는 사람도 있는데 

어떻게 우리가 하나가 될 수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가 되는 내용과 근거는 결국 성경 66권입니다.


엡 4:1-3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여기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한 번 생각해보세요. 

어떤 일이 가능합니까? 

겸손, 온유, 오래 참음, 사랑, 용납,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심 등등... 

결코 만만하게 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한마디로 말씀을 드리자면 하나가 된다는 것은 우리 성질대로 안 되는 겁니다. 

아니 결코 우리 성질대로 못 하는 겁니다. 

이 성경 66권의 넓이를 다 헤아리지도 못하면서 

자기가 알고 있는 쥐꼬리만큼의 내용을 가지고 아무에게나 덤벼들고 있는 겁니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서서 

자기의 능력과 실력을 자랑하고 

함부로 다른 사람들에게 정죄의 잣대를 들이밀고 있는 겁니다. 

사실 우리는 우리가 터로 가지고 있는 

이 성경의 말씀이 주는 거룩한 영향력이 

어느 정도 넓고 큰지를 아직 잘 모르는 겁니다. 


고작해서 몇 개의 말씀을, 

그것도 순전히 내 마음에 드는 말씀만을 외우고 사는 정도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말씀의 전부인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경의 말씀으로 여전히 기다려주고 계시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서 기다리신 것처럼 기다려야만 합니다. 

그만큼 참고 견뎌야만 합니다. 

참고 견딘다는 것은 단순히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행함이나 실력이나 능력의 문제가 아니고 인격의 문제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 인격은 바로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서 세워지는 것입니다. 

인격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자라는 겁니다. 


성경의 말씀은 먹으면 먹을수록 우리의 전 인격이 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의 말씀은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단순하게 종이 위에 쓰여 있는 글자의 배열이 아닙니다. 

성경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인격적인 변화가 가능하도록 해줍니다. 

그래서 인간적으로는 전혀 가능하지 못한 일까지도 결국 가능하게 만들어 줍니다.


고전13:8-13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원수까지도 사랑을 해야만 합니까? 말아야만 합니까? 

해야만 합니다. 

분명하게 우리가 잘 압니다. 


그러나 살다보면 사랑하게 됩니까? 안 하게 됩니까? 

안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깨끗하게 포기하고 미워하는 것이 훨씬 더 빠르고,

내게 있는 실력으로는 겨우 미워하지 않을 정도밖에 되지 않는 겁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사랑하게 되는 겁니다. 

지금은 비록 희미하고 부분적으로 밖에 되지 않는 일이지만 결국에는 사랑하게 됩니다.


고전 3:10-11절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같은 터 위에 있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또 그 분의 말씀을 기본으로 알고 사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그렇지 못했다면 우리는 벌써 망한 존재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받아 주시기로 하셨기 때문에 

이만큼이라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뭡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말씀 안에서 

우리는 결국 서로 사랑하고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결국은 그것입니다. 


그러니 지금부터 그 때까지는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늘 우리의 터로 다시 돌아가는 삶을 살아야만 합니다. 

우리가 세워진 터를 다시 확인을 해야만 합니다. 

말씀의 터 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서 우리를 돌아봐야만 합니다. 

내 감정과 내 기분과 내 생각대로가 아닙니다. 

성격대로 하고, 

성질대로 하고, 

기분대로 할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솔직히 기분대로 하면 벌써 종을 쳤을 인생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는 삶입니다.


고후 2:14-17절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출처 : 나무목교회
글쓴이 : 뜨거운얼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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