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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주 안에서 / 엡 2:21-22 (신 312쪽)

21-22절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사도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 되어가도록 함께 지어져간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건물의 모퉁이 돌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히 모퉁이 돌의 역할에만 그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중심입니다. 

아니 더 엄격하게 말씀을 드리자면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 그 자체입니다.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가 가지고 있어야만 하는 절대적인 가치 기준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기준에서 흔들리면 교회가 아닙니다. 

아무리 사람이 많이 모여들고, 

여러 가지의 귀한 일들을 감당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가치의 기준이 되지 못하면 

그것은 이미 교회가 아닙니다. 


그런데 정말 아쉽게도 현재 상당수의 교회공동체가 

교회로서의 존재 가치를 잃어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를 잃어버린 

단순히 사람들의 모임으로서의 공동체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더욱 아쉽고 한심한 것은 

그렇게 되어 가는 것이 곧 시대를 따라가고, 

심지어는 시대를 앞서가는 교회공동체가 되는 것처럼 호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많은 교회들이 그렇게 되어가려고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교회되는 그 근본의 기준과 기초가 아예 무너져 내리고 말았습니다. 


사람은 정말 많이 모였는데 

교회다운 맛과 멋은 실종이 되어버린 

그냥 사람들만의 소리로 가득 찬 교회가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원래 어떤 가치로 무장되어 있어야만 합니까?


오늘 본문에 사도 바울이 강조하고 있고, 

또 본문의 제목으로 내 건 말씀이 

바로 교회 공동체의 기본이요, 기초요, 교회 그 자체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본문을 따르고, 제목을 따르자면 

그것은 “주 안에서” 입니다. 

좀 더 자세하게 표현을 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입니다. 

좀 더 확대해서 말씀을 드리면 “성령 안에서” 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뭡니까? 

주 안에서이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이든지, 

성령 안에서 이든지 할 것 없이 

그 공통점은 우리가 주나 또는 핵심은 절대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의 중요한 구성원이라고 생각이 되는 우리 안에서는 

교회로서의 그 어떤 근거도 없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사람이 교회공동체의 구성원이기는 하지만 

사람 자체가 교회의 근거는 아니라는 겁니다. 


이것이 정말 아주 중요합니다. 

너무 너무 중요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중요한 사실을 

정말 너무 자주, 

아주 쉽게, 

천연덕스럽고, 

자연스럽게 잊어버리고 살아 버린다는 겁니다. 


그래서 엉뚱하게도 교회의 주인이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그리고 너도 나도 다 그렇게 되어 버리니까 

이제는 교회가 누구를 위해서, 

또 무엇을 위해서 존재하는지 조차도 망각해버리는 시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또 왜 교회를 다녀야 하는지 조차도 잊어버렸습니다. 


때문에 교회 공동체가 사람의 편의시설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자주 찾는 편의점이나 구멍가게가 되어 버렸습니다. 

좀 더 현대적으로 말하면 스포츠 센터가 되었고, 

커피숍이나 카페가 되어 버렸습니다. 

심지어는 마을금고가 되었고, 

문화센터가 되었고, 

요가를 하는 곳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정작 

교회의 기본이 되고, 

기초가 되고, 

근본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 문 밖에 서 있는 안타까운 현실이 되어 버렸습니다. 


편의점을 다니신 적도 없고, 

골프를 배우신 일도 없고, 

꽃꽂이나 요가는 해보지도 않으신 

예수님이 교회의 머리요, 모퉁이 돌이십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오늘의 교회에 대해서 얼마나 낯설게 여기실까요? 

그런데 이제 교회의 그런 현상들에 대해서 아무도 안타까워하지 않는 독한 세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오히려 어떻게 하면 더 세상적으로 이 세상에 접근을 해서 

좀 더 많은 인기를 끌까 하는 생각과 방법이 정당화되고 

당연하게 여겨지는 악한 세대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롬12:1-2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우리가 이 세상을 접근하는 방식은 

언제든지 우리 몸을 산 제물로 드리는 제사의 방식입니다.

제물이 뭡니까? 

죽는 겁니다. 

손해 보는 겁니다. 

희생하는 겁니다. 

양보하는 겁니다. 


그것도 우리 몸을 드리라는 겁니다. 

즉 우리 삶을 드리라는 겁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몸을 드리기를 거부하고 삽니다. 

가까운 곳, 편한 곳, 쉬운 곳부터 찾습니다. 


육신을 위해서는 걷기 힘든 노구를 이끌고도 남한산성을 올라가는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는 마을버스를 타고 예배를 나오는 것도 힘들어 합니다. 

다이어트를 위해서는 몇 시간을 땀을 흘리면서도 

주를 위한 봉사와 섬김에는 팔짱 끼고 뒷짐을 지고 쳐다보기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의 삶을 사셨을 뿐만 아니라 

십자가의 고통까지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분을 믿는 우리는 육신의 질고나 어려움이나 고통을 참아내지 않습니다. 

좀 더 쉬운, 

좀 더 편한, 

그러면서도 생색이 더 나는 곳을 찾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그런 우리들에게 아주 강한 어조로 격려하는 말씀이 들어 있습니다.


“성전이 되어 가고”, “지어져 가느니라” 는 표현의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굳이 따로 설명을 안 드려도 이런 표현의 의도를 아시겠죠? 

진행형입니다. 

다 된 것이 아닙니다. 

지어진 것이 아닙니다. 

되어 가는 것이고,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때문에 도중에 실수도 있을 수 있는 겁니다. 

이런저런 시행착오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초는 변하질 않습니다. 

기본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기초와 기본이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비록 약하고 보잘 것 없어서 

이렇게 저렇게 흔들릴지라도 반드시 성공과 완성에 이르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나서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비록 우리들에게서 아무런 기대나 희망이 없어 보일지라도 

절대로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항상 염려하고 걱정하고 있습니다. 


왜죠? 

우리 신앙생활의 기준을 자꾸만 전혀 엉뚱한 곳에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갑에 두고 있고, 

세상에 두고 있고, 

감정에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준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합니다. 

그렇게 해서 이 세상에서 좀 더 잘 살게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 뿐입니다. 

아니 그럴수록 하나님과의 관계는 점점 더 멀어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 차용해서 사용할 뿐, 

하나님께서 바라고 원하시는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때문에 삶을 통해서 거룩한 성전이 지어지질 않습니다. 

아니 지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또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성전을 지어가야 하는데 그런 일이 없습니다. 


때문에 사도 바울이 디모데를 통해서 경고하고 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딤전 4:7-10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미쁘다 이 말이여 모든 사람들이 받을 만하도다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힘쓰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


경건에 이르도록 나를 연단해야만 하는데 

그 기준이 바로 믿는 자들의 구주, 곧 예수 그리스도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의 모든 소망과 모든 기준을 주 안에 두어야만 합니다. 

물론 그렇게 하면 더디게 됩니다. 


그러나 되어 가고, 

지어져 간다고 하는 것이 사실 

이미 어느 정도의 기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에게는 그 시간 동안 

기다리고 애쓰고 자리를 떠나지 아니해야만 하는 인내가 필요한 것입니다. 


인내가 필요하다는 것은 그것이 쉽다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정말 어려운 것입니다. 

수많은 회의와 갈등과 아픔과 상처가 난무하는 것입니다. 

정말 이대로 가면 제대로 가는 것인지에 대한 엄청나게 많은 의심이 있게 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마귀까지 움직이는 세상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정신을 더욱 정신을 차려야만 합니다. 

그저 그렇게 물 흐르듯이 살 때가 아닙니다. 

성경의 말씀대로 하자면 깨어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신랑이 언제 올지 모르니까 

등불이 꺼지지 않도록 등잔에 항상 기름을 채워 가지고 살아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실제로 우리의 등잔은 그 형편이 어떻습니까? 

제대로 기름을 채워두고 있습니까?


마25:8-10절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와 너희가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잘 보시면 기름이 떨어진 처녀들이 기름이 넉넉한 처녀들에게 도와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기름을 가진 처녀들은 도와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기름을 사러간 사이에 신랑이 왔습니다. 

신랑이 오니까 혼인잔치는 시작되었고 그 집 문은 닫혔습니다. 


기억하셔야 합니다.

결정적일 때는 정말 봐주시지 않으십니다. 

그 때 가서 후회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는 때가 오는 겁니다.

그러니까 오늘을 훈련하고 살아야만 합니다. 


버릴 것은 버리고, 

정리할 것은 정리하고, 

내려놓을 것은 내려놓고 살아야만 합니다. 


그런 훈련이 없이 막연한 생각으로 살면 안 되는 겁니다.


그 때가 되면 충분히 잘 할 것처럼 생각이 들지만 

준비 없고, 연습 없고, 훈련 없이는 안 되는 겁니다. 

끊임없이 반복훈련을 해야만 합니다. 

지금부터 깨어 준비해야만 하는 겁니다. 

지금부터 주 안에 살아야만 합니다. 


그러려면 세상 것에 대한 짐을 자꾸 가볍게 해야만 합니다. 

세상에 대한 생각과 관심을 자꾸 버리고 살아야만 합니다. 

세상 모든 걱정 근심을 다 몽땅 지고 오면 

하나님은 다 해결해주신다는 생각을 버려야만 합니다. 


오히려 모든 짐을 다 내려놓고 살아야만 합니다. 

짐을 가볍게 꾸려야만 합니다. 


사실 그게 잘 안 되는 정상입니다. 

이거 버리고 저거 줍는 것이 원래 우리들입니다. 

그렇다고 손 놓고 아예 그렇게 사는 것을 자랑하고 살면 안 됩니다. 


그러니까 기도하는 겁니다. 

자꾸 내려놓는 연습과 훈련을 해서 이 세상의 짐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합니다. 

주 안에서 사는 것을 방해하는 일체의 것을 

가려서 내려놓을 줄 아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 성숙한 믿음입니다. 

그래야만 그리스도인답게 

제대로 나눌 수 있고, 

베풀 수 있고, 

섬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이 세상의 것에 대해서 자유하게 살 수 있습니다. 

주 안에서 사는 것은 다 내려놓고 사는 겁니다. 

다 맡기고 사는 겁니다. 

그리고 기다릴 줄 아는 겁니다. 

인내할 줄 아는 겁니다. 

출처 : 나무목교회
글쓴이 : 뜨거운얼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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