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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갇힌 자 된 나 / 엡 3:1-2 (신 312쪽)

3:1-2절 “이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인을 위하여 갇힌 자 된 나 바울이 말하거니와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을 너희가 들었을 터이라”


에베소서는 사도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기록한 옥중서신입니다. 

물론 바울의 감옥 생활이 오늘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감옥생활과 같지는 않았습니다. 

때문에 오늘의 감옥보다는 비교적 자유로웠습니다. 

글도 쓸 수 있었고, 

설교도 할 수 있었고, 

상담도 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 교회에서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보내줘서 

먹고 사는 것에 큰 불편 없이 지낼 수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감옥 생활이 남들에게 권장할 만한 그런 일은 전혀 아니었습니다. 

사람이 단순하게 먹고 사는 문제로만 목표를 삼고 사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사는 문제는 생각보다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참으로 미묘한 겁니다. 

요즘 장마철도 아닌데 장마처럼 비가 내립니다만 

내리는 빗방울의 숫자만큼 복잡한 것이 바로 우리 사람의 삶이 아닐까 싶습니다. 

뭐가 그렇게 걸리는 게 많고, 

따지는 게 많고, 

지켜야 할 것들이 많은지 모릅니다. 

이렇게 살아도 한 세상, 

저렇게 살아도 한 세상인데 

왜들 그렇게 스스로를 얽어매고 복잡하게 사는지 모릅니다. 

몸도 마음도 좀 넉넉하게 풀고 살면 좀 어떻습니까? 


그런데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아니 그렇지 못합니다. 

아니 좀 더 솔직하게 그렇게는 못하겠다고 생각하고 다짐하고 사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런 우리들 앞에 오늘 사도 바울이 던져주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이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인을 위하여 갇힌 자 된 나 바울이 말하거니와”


자신은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갇힌 자 되었다고 하는 겁니다. 

단순하게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면 되는 일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일입니다. 

때문에 자신이 처하고 있는 감옥생활이 그렇게 불편한 것은 없을지라도 

여전히 자신 속에서 풍겨져 나오는 그리스도 예수의 일이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뭡니까? 

이방인을 위해서 복음을 전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감옥생활이지만 자신의 삶을 중단할 수 없는, 

그리고 단순하게 먹고 사는 문제의 해결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자신만의 사명이 있다는 겁니다. 


결국 사도 바울이 갇힌 곳은 감옥이 아니라 자신에게 부여된 사명 안에 갇힌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만히 있을 수 없는 겁니다. 

이렇게 편지라도 써서 그 사명을 감당하고자 하는 거룩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 겁니다. 


생각해보세요.

솔직히 사도 바울의 처지와 입장에서는 어떤 것이 먼저입니까? 

감옥에서 풀려나는 것이 먼저입니까? 

아니면 이렇게 편지라도 써서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먼저입니까? 


솔직히 감옥에서 풀려나는 것이 먼저입니다. 

우리가 지금 다 그렇게 바라고 원하고 살지 않습니까? 

대학을 보내주시면, 

집을 사주시면, 

아니면 남편이 예수 믿게 해주시면, 

이번 이 일만 해결되게 해주시면 이라고 하면서

특별기도하고, 

작정기도하고, 

안 내던 헌금까지 내면서 원하는 게 

모두 다 먼저 감옥에서 풀려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렇죠? 

솔직히 그렇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뭐라고 하셨습니까? 

그렇게 아무 것도 모르는 척 하지 마시고 진짜 뭐라고 하셨습니까?


마 6:33-34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일 년 동안 설교를 하면 이 말씀은 거의 한 50회 이상을 언급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모른 척을 할 수 있습니까? 

다 아시는 내용입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옥에 갇혀 있어도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형편과 처지는 사도 바울보다는 좀 더 나은 형편에 있습니다. 

최소한 옥에 갇히지는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도 바울과 비교해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지 못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사명을 감당하지 못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는 우리의 비겁한 변명들은 다 뭡니까? 

우리가 사실 그 변명들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사명들보다 

더 크다고 여기시는 것은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당장에 먹고 사는 문제가 더 크다고 여기는 것은 아니냐는 겁니다. 

돈 몇 푼이나 주면 무엇이든지 열심히 하고, 

아니면 사명이고 뭐고 다 내동댕이를 치고 있지 않느냐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의 옥살이보다 훨씬 더 못한 가치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아니 사도 바울은 복음을 위해서 옥에 갇힌 자가 되었는데, 

우리는 먹고 사는 문제에 갇혀서 복음을 위해서는 전혀 꼼짝도 못 하고 살고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의 가장 큰 힘은 무엇입니까? 

믿음입니다. 

우리가 가진 믿음이 주는 가장 큰 소망은 무엇입니까? 

안이숙이라고 하는 기독교 작가가 쓴 책의 제목입니다.


“죽으면 죽으리이다” 


사도 바울이 고백한 말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말입니다.


롬 14:7-8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성경 말씀을 암송하고 다녀도 이런 말씀을 좀 더 많이 암송해야만 하는 겁니다. 

나한테 뭘 주시든지 아니 주시든지 여부에 관계없이 

무조건 내가 주를 위해서 살고 죽겠다고 하는 겁니다. 

갇힌 자가 되었든지, 

놓인 자가 되어 자유하든지 관계없이 

그저 나를 통해서 주를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겠다고 하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가 그렇게 살면 나한테 뭘 해주실 것이니까 그렇다는 것이 아닙니다. 

만사형통하게 될 테니까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이라고 하는 보자기 안에 축복이 들어 있으니까 그런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가지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 즉 믿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를 어떤 형편에 쓰시든지 

그저 나를 쓰고 있으신 것이 늘 감사하고 영광될 뿐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늘 그저 우리 살아가는 자리가 

높은 자리, 

잘된 자리, 

가진 자리, 

뭔가 좀 행세하는 자리가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를 앞장세워서 바라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 때 왜 우리의 형편과 처지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까? 

우리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용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결국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이 지금 감옥에 갇혀 있어도 당당한 것은 

죄수인 자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마땅히 하실 것이라고 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오히려 자기는 더 죽어야만 한다고 하는

더욱 더 낮아지는 자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높아진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주장되고, 

자기 노력, 자기 수고, 자기 애씀이 있는 사람은 

언젠가는 반드시 자기의 본전을 찾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죽은 사람은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자기의 의사나 주장, 견해가 없습니다. 

심지어는 감정도 없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하든지 그저 감사만 나옵니다. 


사실 우리의 모든 시험이 다 어디로부터 오게 됩니까? 

주 앞에 자기가 행한 어떤 일을 드러내려고 할 때 옵니다. 

자기 행한 일, 

자기 행한 수고, 

자기가 애쓴 결과에 대해서 뭔가를 바랄 때 오게 됩니다. 


주의 일에 봉사한다는 것이 뭡니까? 

자기가 드러나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의 행한 일이 아무 것도 없는 겁니다. 

했더라도 기억조차 하지 않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일을 기분으로, 감정으로, 재미삼아서 하는 일입니까?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봉사는 죽도록 하는 겁니다. 

아니 죽을 때까지 하는 겁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죽어서 하는 겁니다. 


도무지 나라는 존재는 없는 겁니다. 

도대체 내가 뭘 했다는 사실조차도 모르는 것이 봉사입니다. 


왜냐하면 봉사는 하나님만 기억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만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봉사라는 것은 사람에게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통해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교회에서 하는 일은 어떤 일입니까? 

봉사의 일입니까? 

월급 받고 하는 일입니까?


벧전 4:7-11절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


마지막 때에는 서로 사랑으로 봉사하라는 겁니다. 

그렇게 봉사할 수 있도록 깨어 기도하라는 겁니다. 

그래야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겁니다. 

사람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대충대충 하는 것이 얼마나 우습습니까? 


지금 이명박 대통령이 유럽 순방을 갔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국무위원의 절반인 9명이 참석을 해야만 개의가 되는 국무회의를 

오늘 7분이나 늦게 시작을 했다고 합니다. 

그까짓 7분? 이라고 하실지 모르지만 이런 일은 절대 없다는 겁니다. 

다들 미리 나와서 회의의 내용들을 점검하고, 

보고 준비를 하고, 

국무총리나 대통령보다 먼저 나와서 기다리는 것이 기본 예의라는 겁니다. 

그런데 1명이 덜 나와서 개의를 못하고 있다가 

뒤늦게 나오라는 소리를 들은 국무위원이 부랴부랴 나오고 나서 개의를 했다고 합니다. 

속된 말로 대통령이 없다고 국무위원들이 개판을 치는 겁니다. 


이게 잘 돼는 나라의 모습이겠습니까? 

혹시 우리 신앙생활이 이런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담임목사 한 사람의 눈치만 보는 그런 모습. 

그래서 담임목사가 아무 말 안하면 그냥 나대로 살아도 된다는 식의 

대충대충 하는 신앙생활이 아닌지 요즘 저는 참 궁금합니다. 


물론 그런 성도들의 모습을 보면서 제가 훈련을 받습니다. 

저도 충분히 일반 목사님들처럼 스파르타식을 할 수 있습니다. 

일 년 열두 달 쉬지도 못하게 야단법석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기도해도 그건 바른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 나무목교회가 성장을 하면 내가 주인 노릇 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눈치를 보기보다는 

목사의 눈치와 기호만 살피는 인간노예가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가 여태 신앙생활을 하면서 

주의 은혜 안에서 아는 것은 무엇이고, 

또 모르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것저것 교회의 일에 크게 신경 안 써도 되니까 

신앙생활을 내 맘대로 하는 것 같아서 우선 당장 편할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갇혀 있는 몸입니다. 

복음에 갇혀 있고, 

사명에 갇혀 있고, 

예수 안에 갇혀 있는 자들입니다. 


그런 우리가 우리 맘대로 살아간다고 해서 마음이 편하겠습니까? 

도무지 아무런 생각이 없을까요? 

저는 우리 성도들의 생각이 참으로 궁금합니다. 

이러는 나도 나만의 생각 안에 있는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니지 모르겠습니다. 

때문에 저도 늘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사명 앞에 담대해지게 해달라고...

출처 : 나무목교회
글쓴이 : 뜨거운얼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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