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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비밀을 아는 자 / 엡 3:3-4 (신 312쪽)

3:3-4절 “3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내가 먼저 간단히 기록함과 같으니 

 4 그것을 읽으면 내가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


살면서 비밀을 가져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아니면 지금도 비밀 중에 살아가십니까? 

그럼 비밀이란 무엇을 가리키는 말입니까? 


국어사전에서는 비밀이라는 단어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먼저는 “숨기어 남에게 공개하지 않는 일”이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남에게는 알려주지 않고 숨기고 자기만 알고 있는 일입니다. 


또 하나는 “밝혀지지 않거나 알려지지 않은 속내”입니다. 

그러니까 드러내지 않았거나 나타내지 않으면서 알려지지도 않은 속사정입니다. 


이 둘을 합쳐서 비밀에 대한 단어를 정의해보자면 

개인적으로는 나만 아는 일이고, 

공동체나 단체로 따지자면 두루 다 알려지지는 않은 일이 곧 비밀입니다. 


그러나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 비밀에 대한 자신감과 확신을 아울러 갖고 있다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비밀을 알면 비밀에 대한 자신감과 확신을 갖게 되니까 

그 비밀에 대한 조금의 주저함이나 그 어떤 두려움도 없는 것입니다. 

비밀에 대해서 모르는 남들은 어떨지 모르지만 

나는 그 비밀을 알기 때문에 남들에게는 없는 자신감이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바로 

그런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사도 바울이 그렇게 알고 있는 비밀을 

바로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에게 다 알렸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비밀은 비밀이기는 하지만 

모두가 다 알고 있는 비밀, 곧 두루 알고 있는 비밀이라고 하는 겁니다. 

한마디로 공공연한 비밀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과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은 바로 그 비밀을 아는 사람인 것입니다. 

물론 사도 바울과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만 아는 비밀은 아닙니다. 

오늘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도 다 아는 비밀입니다. 

우리도 이 비밀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럼 사도 바울과 에베소 교회 성도들과 

오늘의 우리까지도 다 아는 그 비밀이라는 것은 도대체 뭡니까? 


오늘 본문 말씀을 인용해서 이야기를 하자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비밀”입니다.

“그리스도의 비밀”은 그리스도에 관한 비밀이라기보다는 곧 그리스도 자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가 곧 비밀입니다.


골 2:1-3 “내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무릇 내 육신의 얼굴을 보지 못한 자들을 위하여 

얼마나 힘쓰는지를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이는 그들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확실한 이해의 모든 풍성함과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니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곧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다 감추어져 있습니다.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살아가는 인생의 참 맛을 아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사는 기쁨을 아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사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기쁨을 아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아무에게나 다 알려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만 아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그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알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삶이 성공적인 것은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로 삶을 살 줄 아는 겁니다.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비밀인 것입니다. 

누구나 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누구나 다 이 세상을 하나님의 은혜로 살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세상을 살지 못하니까 그들에게 세상은 어떻습니까? 

자기의 실력으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세상이 피를 튀기는 전쟁터가 된 것입니다. 

이 세상의 것을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더 가지려고 

온갖 술수와 모사와 방법을 다 동원하는 것입니다. 

누구라도 다 밟아 눌러야만 위로 올라갈 수 있는 겁니다. 


때문에 

삶에 대해서 여유도 없고, 누림도 없고, 기쁨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삶의 기쁨을 찾을 수 없고, 

누릴 수 없는 철저하게 고립되고 단절된 외로움 속에 몸부림을 치고 있습니다. 

누리는 것이라고는 

거룩한 삶에 대해서 그 어떤 영향력도 주지 못하는 

물질만을 붙들고 있을 뿐입니다. 

물질로 누리는 것은 누리는 것이 아니라 망해가는 것입니다.


눅18:18-27 “어떤 관리가 물어 이르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네가 계명을 아나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여짜오되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 사람이 큰 부자이므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듣는 자들이 이르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이르시되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이 젊은 관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고 사는 비밀을 버리고 

물질에 대한 욕심을 가지고 근심하면서 오늘 여기서만 살기로 한 것입니다.

이 사람이 어떤 사람입니까? 

종교적으로는 하나님을 알고, 

또 하나님의 법도 나름대로 지킨다고 지키는 그런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도 누가 가자고 한 것도 아니고, 

또 오라고 한 것도 아닌데 스스로 찾아온 것입니다. 

그런데도 세상 것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따르지 못하는 겁니다.

다 버리고 포기하면서 얻게 되는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결국 근심과 염려와 고통 속의 세상 삶으로 돌아가 버린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 주변에도 이런 사람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세상 것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하는 무늬만 예수 믿고 따르는 성도들이 너무 많습니다. 

아니 더 솔직하게 고백하고 말씀을 드리자면 우리도 이럴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말씀 안에, 믿음 안에 산다고 하면서도

우리의 눈이 자꾸만 물질로 가고, 세상으로 가고, 내 민족과 기쁨으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흔히 사용하는 말 중에 “은혜가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저도 월요일에 제 동기가 교회를 개척한 구미를 내려가서 많은 은혜를 받고 왔습니다. 

그런데 화요일 새벽에 그 이야기를 하고 나서 동기의 교회 개척 모습을 보면서 

과연 내가 은혜가 된다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를 좀 고민해봤습니다. 

그런데 바로 어제 필리핀 김종실 선교사님의 파송선교회인 예주선교회에서 선교회보가 날라 왔습니다.

회보에는 신학교의 건물이 너무 낡아서 철거하고 

그 자리에 학교 식당과 창고, 교수 숙소를 짓겠다고 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습니다. 

예상하는 건축 경비가 총 3천 5백만 원이었는데 

선교회 안의 회원목사님과 장로님이 경비를 내서 짓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원래 그 건축을 우리 나무목교회가 하려고 개척했을 때부터 약속했었던 일입니다. 

내가 해야만 하는 것인데 내가 못하니까 다른 손길을 통해서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면서 

내가 은혜가 된다고 떠드는 말이 그냥 나한테 이렇게 저렇게 도움이나 되고, 

나도 그런 은혜를 입었으면 하는 바람 때문에 하는 소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지고 가야만 할, 

힘들어도 내가 그 역할을 담당하고, 

내 손길을 통해서 하겠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내 수고는 하나도 없는 채로 내가 바라고 있는 일에 대해서 

누군가가 나타나서 대신 해주는 그런 은혜만을 얻고자 하는 심보가 아닌가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사는데 그 은혜가 언제나 나만을 위한 것으로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힘들어도 기꺼이 그 은혜에 참여하게 되는 존재가 아닌 것입니다. 

그냥 떨어지는 이익만 차지하려고 하는 얄팍한 생각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은혜를 타령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내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힘들고 어렵더라도 내가 짊어지고 가야만 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되어야 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말씀도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누가복음 9:23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분명하게 제 십자가, 즉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하십니다. 

십자가가 뭡니까? 

희생입니다. 

고난입니다. 

죽음입니다. 

그것도 뭔가 대가가 있는 것이 아닌 

그냥 손해 보는 희생이요, 

억울하게 당하는 고난이고, 

죽음입니다. 


그것도 대충 며칠 동안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그러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예수 그리스도의 비밀을 아는 사람은 그렇게 살기를 당연하게 여기라는 의미입니다.


사도 바울도 역시 마찬가지의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행 20: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목숨 걸고 달려가는 겁니다. 

때문에 인간적으로 누리고 있는 모든 환경은 

다 내던지고, 포기하고, 이미 기억조하 하지 않은 채로 달려가는 겁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미래에 대한 그 어떤 보장도 없고, 대책도 없습니다. 

하루하루 살아가기가 버거운 그런 삶을 살 뿐입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래도 행복하다는 겁니다. 

죽기를 각오하고 달려가는 그리스도의 비밀을 맡은 자의 삶이지만 

여전히 만족하고 감사하고 행복한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공공연한 비밀이지만 

진짜 비밀이 되는 이유는 바로 이 맛을 아느냐 모르느냐의 차이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맛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때문에 이 세상에서 사는 것에 그렇게 크게 연연해하지 않는 것이 지극히 정상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주변을 돌아볼 줄도 알고, 

나눌 줄도 알고, 

좀 손해 볼 줄도 아는 겁니다. 


그리고 그런 우리들의 삶 속에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아는 지혜와 지식이 충만한 겁니다. 

때문에 남들은 우리더러 미련하다고 하고, 어리석다고 하고, 바보 같다고 하더라도 

기꺼이 공개되어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고 힘차게, 씩씩하게 가는 겁니다. 

이 길의 기쁨을 우리는 알기 때문입니다. 

출처 : 나무목교회
글쓴이 : 뜨거운얼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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