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이 담긴 계명 (십계명3,4계명)
출애굽기20:7~11
2004년 10월 24일 주일낮예배 최일환목사 설교
20:7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20:8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20:9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20:10 제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20:11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설교:
주일 낮 예배마다 十誡命을 살펴보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 있습니다.
지지난주에는 십계명에 담긴 하나님의 사랑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고 지난주에는 1,2계명을 살피며 함께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요약해보면 십계명은 지켜서 구원 받으라고 준 계명이 아니고 구원받은 백성이 지켜야 할 계명으로 주셨으며, 십계명은 오직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바로 알고 섬겨야 하며 偶像은 헛것이기에 우상을 섬기는 사람은 하나님이 대적하는 사람이 된다고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3,4계명을 살피면서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A. 먼저 제 3계명을 살펴봅니다.
7절입니다.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입니다.
1. 妄靈되이 일컫는다는 말은 어떤 뜻입니까?
1)말로 하나님의 신성을 더럽히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에는 하나님의 人格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이 너무 거룩한 이름이기에 하나님의 이름을 읽지 않고 그냥 주라고 읽었습니다. 원래 히브리어는 자음만 있고 모음이 없었기에 읽지 않고 수 천년을 내려오다 보니 글자의 發音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래서 후대에 히브리어 모음을 개발했는데 그 하나님이란 글자가 “여호와”로 읽혀 지기도하고 “야훼”라고도 읽혀지기도 하였습니다. 어느 것이 정확한지 아직 모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너무 거룩한 이름이기에 함부로 입에 오르내리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부모의 함자를 損傷시키는 것은 곧 부모를 해롭게 여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머리나 수염을 깍지 않는 이유도 부모가 물려준 몸을 손상하면 불효라는 생각 속에 살던 문화입니다. 그러니 부모의 이름은 함부로 부르지 못하여 字자를 붙여 읽는 것이 우리 문화입니다.
우리 동양 사람들은 이름 자체에 그 사람의 名譽, 그 사람의 身分, 그 사람의 家門이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름을 매우 소중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품행이나 행동이 잘못되면 가문의 명예를 더럽혔다하며 自決하는 것이 용인되던 시대도 있었습니다.
중국의 어느 족속에서는 가장 무서운 형벌은 종이에 부모의 이름을 써서 그 종이를 태워 마시게 하거나, 씹어 삼키게 하는 것이랍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죽음을 택한다고 합니다. 이 벌이 그토록 무서운 이유는 부모의 이름을 태워 먹는다는 것은 곧 부모를 불에 태워 먹는 것과 같은 불효라고 같다는 생각 때문이랍니다.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그런 것을 벌이라고 했다면 얼마든지 받겠다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에는 하나님의 人格이 담겨있고 그의 속성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를 하거나 그 이름으로 약속을 하고 지키지 못하는 행위가 바로 신성모독입니다.
마태복음7장 21절 이하에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7: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7:23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하셨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주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예언도 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권능을 행할 때 주님의 이름을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이 또한 신성모독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사용하여 신성을 모독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유럽이나 영어권에서 “god damn you”이란 말을 씁니다. “천벌을 벋을 놈”이란 뜻입니다. 이것이 욕이 되었습니다. 누군가 자기를 힘들게 하거나 애를 먹이면 이런 욕설을 합니다. 우리나라의 “18놈”이란 것과 같은 용도입니다. 미국영화를 보다보면 너무 어처구니없으면 "jesus"라고 합니다. 어쩌다 그렇게 되었는지 모르나 우리도 그럽니다. 너무 황당하거나 어이가 없으면 “주여”라고 합니다. 혹이나 우리가 이런 망령된 짓을 하지 않기를 축원합니다.
2)경솔한 행동이나 농담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행위입니다.
사람들을 웃기기 위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는 농담이 얼마나 많습니까? 예전에 코메디안이 조용기 목사님 흉내를 내면서 “신이시여!” 하며 코메디를 한 것이 기억납니까? 하나님을 코메디 대상으로 삼고 그것으로 사람을 웃긴다면 그야말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行爲를 주변에서 보거든 얼른 그 자리를 피하시기 바랍니다. 왜요? 거룩한 존재를 거룩하게 여기고 존경해야 하는데 그냥 그런 자리에 있다가 보면 나의 경건을 잃게 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누가 여러분의 부친의 함자를 가지고 장난을 친다면 여러분은 그 자리에게 계속 웃고 있을 것입니까? 그냥 앉아 있는 것 자체가 부친을 욕되게 하는 것이고 더 나아가 자신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행동을 말릴 수 없거든 빨리 피하시고 다시는 그런 부류의 사람과 어울리지 않아야 합니다.
시편1편에 복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한다”고 하였습니다.
노아의 아들 함이 왜 저주를 받습니까? 아버지의 허물과 실수를 들추어냈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경솔하게 하여 욕되게 한다면 어찌 죄 없다고 할 것입니까?
3)위선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행위입니다.
겉으로는 “주여, 주여” 하면서도 주님의 말씀을 행치 않는 행위입니다. 행함이 없는 기도, 마음이 담겨져 있지 않는 찬양, 거지도 받지 않을 형식적인 헌금, 이런 종류가 교회안에서 얼마나 많습니까? 솔직히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경우가 많습니까? 아니면 세상에서 더 많습니까? 교회 안에서가 더 많습니다.
實踐하지도 않으면서 거룩한 척 하는 기도, 입술로만 하나님을 높이는 찬양, 심지어 말로는 流暢하게 설교하는데 자신은 행치 않는 설교자, 이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하는 죄악인 것입니다.
따라서 합시다. /사람은 속을 수 있으나/ 하나님은 속일 수 없다/
사람은 기도에 감동받고 찬양에 감동받고 설교에 감동받을 수 있으나 하나님은 온전한 것으로 드리지 않으면 속지 않습니다. 가장 끔찍한 행위는 자기가 고백한대로 행치 않으면서도 그 하나님이 자신에게 복을 주시리라고 믿는 행동입니다.
우리 주변에 그런 사람이 많이 보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래서 교회 나가고 싶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우리는 어떻습니까?
왜 예수님이 그토록 화를 내셨습니까? 왜 예수님의 입에서 “독사의 새끼들아 화 있을진저”하면서 진노했습니까? 외식입니다. 회칠한 무덤이라고 하셨습니다. 신앙의 속 다르고 겉 다른 것이 그토록 주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킨 것입니다.
2. 망령되게 한 결과는 어떤 것입니까?
1)무서운 심판이 있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계명은 아주 완곡하게 표현합니다.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이 무슨 의미입니까? 죄가 있단 말입니다. 그 죄에 대한 심판이 반드시 있다는 표현을 강조한 것입니다.
2)또 하나는 逆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면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장안의 성도 여러분!
정말 조심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자녀 삼으신 그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고 함부로 대하는 죄를 주를 믿는 우리가 한다면 어찌합니까?
오히려 그 이름을 높이며 거룩하게 받들고 경건하게 사는 성도가 되어야 복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B. 둘째로 제4계명을 살펴봅니다.
“20:8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입니다.
한번 4계명 전체를 읽어보겠습니다.
20:8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20:9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20:10 제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20:11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우리는 이 네 번째 계명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1.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는 뜻을 알아야 합니다.
무엇을 기억하라구요? 안식일입니다. 왜 기억하라고 했을까요? 기억하라는 말은
첫째는 소중하게 여기라는 것입니다.
이 날을 다른 날과 같이 다루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날과 저 날이 다 같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이 날은 하나님이 명하신 날이요 하나님이 복을 약속한 날입니다.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그러기에 우리도 이 날을 참으로 귀하게, 그리고 거룩하게 여기며 지켜야 할 것입니다.
왜 주일을 빼먹습니까? 사람들은 가치를 중요시합니다. 가치가 있으면 안 놓칩니다. 그 가치가 다르기 때문에 사람들은 살아갑니다.
배추가 너무 비싸서 금치라고 할 때 어느 할인마켓에서 배추 한포기를 100원에 판다고 광고하자 수백 명이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가 문이 열리자마자 달려가는 진풍경이 있었습니다. 왜 그들은 그렇게 난리였나요? 가격이 너무 싸기에 당시 한포기에 4000원~5000원 할 때 100원한다니 5포기만 사도 2만원을 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價値문제입니다.
商業이 존재하는 이유는 이 가치가 사람마다 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서로 가치 있는 것을 다른 가치로 바꾸는 것입니다.
자장면 한 그릇을 3500원에 사먹는 이유는 3500원의 돈을 주는 것에 비해 편하고 맛있고 하기에 사먹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분에게는 그 3500원은 하루 종일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이기에 자장면을 사먹는 것은 너무 아까운 돈입니다. 가격은 소요와 공급의 가치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서의 예배는 얼마의 가치가 매겨집니까? 그 가치가 다른 것의 가치에 밀리면 주일을 빼먹는 것입니다.
주일의 가치, 하나님을 섬기는 봉사에 대한 가치가 온전히 매겨질 때 주일을 거룩하게 소중하게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는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달력이 오늘날과 같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하루하루 날자를 잘 살펴야 안식일을 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너무 바쁘다보면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지나게 됩니다. 그래서 안식일을 놓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요즘도 어떤 이들은 그럴 때가 있습니다. 수요일 잊는 것은 비일비재하고 심지어 주일도 잊어버립니다. 그러니 당대에는 어떠했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중요하면 잊을 수 없습니다.
2. 6일 동안 어떻게 지키라 하십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제4계명은 안식일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안식일을 제대로 거룩하게 지키려면 엿새를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안식일에만 예배를 드린다고 생각하여 왔습니다. 그러다보니 신앙생활이 잘못되어왔던 것입니다. 6일간도 열심히 일하면서 하나님 앞에 살면 그것이 제7일 예배를 성공케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6일간도 예배자의 삶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6일은 어떻게 살든 상관없고 제7일만 잘 지키면 복이 온다는 생각은 잘못된 신앙입니다.
6일 사역이 온전해져야 안식일이 거룩하게 지켜지고 안식일이 거룩하게 지켜져야 6일도 거룩하게 지켜지는 것입니다.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진정한 안식은 勞動을 통해 얻어지는 것입니다. 일을 하지 않으면 안식은 없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勞動의 가치를 인정하는 宗敎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시고 곧바로 일을 명하십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 하십니다. 정복하고 다스리는 것, 이것이 일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열심히 일을 해야만 행복합니다.
노는 것이 좋다구요? 일이 있을 때 놓는 것이 복입니다. 정년퇴직하신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일이 없으니 죽을 맛이라는 것입니다. 제일 힘든 것이 일자리를 잃는 것입니다. 요즘 경제가 어려워져서 일자리 찾기가 무척 힘든 시대입니다.
힘을 써 일해야 합니다. 땀을 흘리며 노동을 할 때 건강과 행복이 찾아옵니다. 어떤 분은 가정주부로 일을 하는데 직업을 물으니까 무직이라고 합니다. 아닙니다. 무직이 아닙니다. 가정일도 중요한 일입니다. 그것도 열심히 힘을 써 해야 합니다. “살림살이”입니다. 식구들을 먹여 살리는 일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까? 그런데 많은 분들이 자칭 부엌데기라고 생각하고 스스로를 무능력한 존재로 여깁니다.
엿새 동안 일해야 합니다. 주5일 근무제가 좋은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주 6일 근무를 명하고 있습니다. 서구 교회가 5일근무제를 도입하고 나서 교회가 문을 닫기 시작했고 윤리도덕이 땅에 떨어지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3. 어떻게 거룩하게 지키는 것일까요?
1)共同體와의 예배를 드려야합니다.
예배를 거룩하게 지키되 혼자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제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너나 네 아들, 딸, 심지어 짐승, 손님들과도 함께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안식의 기본정신입니다. 안식은 “나 홀로 조용히”가 아닙니다.
가족 공동체와 교회 공동체 모두가 안식을 지키며 예배하는 것이 거룩하게 지키는 것입니다.
2)공동체와의 안식입니다
또한 안식일의 기본은 쉼에 있습니다. 쉼이 없는 안식은 완전한 안식이 안 됩니다. 혹자는 예배만 드리면 주일을 지켰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배드리고 직장으로 일터로 달려가 일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일 성수가 아닙니다. 교회공동체에서 예배하고 가정공동체에서 온전한 안식을 누려야만 합니다. 환경을 이야기 할 수도 있고 어쩔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고 명백하게 말합니다. 일하지 말라고 합니다. 누굴 위해서일까요?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입니다.
4. 문제는 왜 사람들이 안식의 복을 놓치는가 입니다.
두가지 이유인데
첫째는 마귀의 교묘한 전략입니다.
마귀는 우리를 바쁘게 합니다. 정신없이 바쁘게 하여 쉴 수 없게 합니다. 그러다보니 주일의 복을 놓치고 살게 됩니다. 또한 마귀는 사람이 탐심에 노예가 되게 하는 전략을 씁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욕심을 채우게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마귀의 전략입니다.
둘째는 쉼의 價値를 몰라서입니다.
쉬는 것을 죄악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입니다. 오늘 본문을 잘 보세요. 하나님도 제 칠일에 쉬셨습니다. 그리고 이 날을 복되게 하셨습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쉼의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쉼은 행복을 누리게 만드는 절대적인 요소입니다. 일하기 위해 쉬는 것이 아니라 잘 쉬기 위해 일하는 것입니다. 그토록 열심히 일하는 이유는 잘 쉬기 위함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십계명중에 복이 있다는 말은 4계명에만 언급되어 있습니다. 잘 지키면 놀라운 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가정행복의 복, 육체 건강의 복, 그리고 영적 건강의 복이 임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계명과 4계명은 복이 담긴 계명입니다. 이 계명을 통한 놀라운 복을 우리 모두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통성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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