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도마가 되지 않으려면
요한복음20:24~29
2005년 4월 3일 주일낮예배 최일환 목사 설교
20:24 열두 제자 중에 하나인 디두모라 하는 도마는 예수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20: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20:26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20: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0:28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20:29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설교:
사람은 누구나 다 의심을 갖고 삽니다. 의심은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이후로 누구나가 다 같고 있는 현상입니다. 이 의심은 부정적인 면들이 많지만 또한 반대로 긍정적인 요소도 가지고 있습니다. 의심 때문에 인간관계가 갈등과 아픔이 많으나 또한 의심 때문에 과학적인 연구가 이루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에서 의심은 유익보다는 해를 줄때가 많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의 지식이나 경험을 뛰어넘는 일이 생기면 의심하고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누리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영적 생활을 하려면 이 의심을 뛰어 넘어야만 승리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의심하는 제자들을 책망하시는 모습이 많이 등장합니다. 베드로가 물위를 걷다가 빠져 들어갈 때 주님이 그를 건져 주면서 말하십니다.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또 마태복음21장에서는 무화과나무를 말라 죽은 것을 이상하게 여기는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교훈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 것이다”
누가복음 24:38에서는 부활하신 주님을 믿지 못하는 자들에게도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하며 책망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반면에 로마서 14:1에서는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라고 하십니다. 믿음이 연약한자가 의심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를 정죄하거나 비판하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보세요. 예수님의 제자로 3년 동안 따라다녔던 도마가 부활하신 주님을 제자들이 만났다고 하는데 그 사실을 믿지 못하겠다고 큰소리를 칩니다. 그러나 몇일 후 예수님이 그 도마가 제자들과 함께 있을 때 나타나셔서 만져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는 믿음없는 자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십니다.
왜 도마는 의심을 했을까요?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3년씩 따라다니면서 수많은 奇蹟과 表迹을 보았을 것입니다. 주님이 일으키신 기적이 어디 한 두 가지입니까? 수없이 많은 이적을 행하셨는데 그 사실을 본 그 도마가 어떻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지 못하겠노라고 큰소리를 쳤을까요?
왜 도마는 주님께 책망을 받았을까요? 어쩌다가 의심많은 사람이 되었을까요?
1. 그는 주님의 약속을 믿지 못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여러차례 당신의 부활을 예고하셨습니다.
마16:21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17장23절에서도“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심히 근심하더라”
20장19절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어 그를 능욕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박게 하리니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그런데 도마는 그 약속을 “그냥 하는 소리”로 들었습니다. 그냥 제자들을 위로하느라 하는 소리로 가볍게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의 분명한 약속이었습니다. 그 약속을 그냥 하는 소리로 흘려버리니 결국 의심하는 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에 나오는 말씀은 그냥 하는 소리가 한 구절도 없습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이 언약은 반드시 이루어질 언약입니다. 이 언약을 “그냥 하는 소리”로 받지 말고 하나님이 내게 주신 약속으로 받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신구약 성경이 하나님이 말씀이고 그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믿음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럴 때 여러분에게 놀라운 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의심은 마귀가 가져다주는 선물입니다.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를 유혹한 사단의 계략을 보세요, 처음에는 한번 떠봅니다.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그러자 하와가 대답하기를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다”고 대답합니다. 만지지 말란 말은 하지도 않았는데 보탰습니다. 정령 죽으리라 하셨지 죽을까 하노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하와는 그렇게 답을 했을까요? 한마디로 약속에 대한 확신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약속에 대한 확신이 없으니까 마귀는 정색하고 거짓말로 속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의 약속은 일점일확도 틀림없는 하나님의 약속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에 대한 의심은 마치 자식이 부모를 친부모인가 의심하는 것 같고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의심은 하나님을 사람 수준으로 끌어 내리는 어리석은 짓임을 깨닫기를 바랍니다.
2. 중요한 자리에 함께 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고난당하신 후 제자들은 매우 두려웠습니다. 우두머리인 예수님을 죽었으니 이제 그 다음 순서는 자기들인 것을 직감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중에도 그들은 날마다 모여 함께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기쁜 소식이 들렸습니다. 제자들이 무덤에서 확인했고 여인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도마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어딜 갔는지 아무도 모르나 아마도 제사장들이나 당시의 로마군대 분위기를 염탐하러 나갔을 것이라 추정해 봅니다.
그러던 어느날 주님이 모여 있는 그 자리에 홀연히 나타나셨습니다. 언제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는 문을 꼭꼭 잠그고 있었는데 주님이 그 가운데 나타나셔서 당신의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19절부터 23절까지를 보세요.
20:19 이날 곧 안식 후 첫 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0: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20:21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0:22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20:23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그런데 정말 안타깝게도 그 자리에 도마는 없었습니다. 정말 중요한 자리였는데 그런 자리에 없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정말 중요한 자리, 정말 중요한 시간은 언제 어디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사람마다 다르겠으나 적어도 우리 예수 믿는 예수쟁이들에게는 예배시간이 그 시간 그 장소가 됨을 믿어야 합니다. 사실 매 예배시간마다 은혜를 받는 것은 어렵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몸으로 나타나시는 것 같은 특별은혜는 매시간 이루어 질수 없습니다.
특별한 은혜는 어느 시간, 어느 예배에서 임할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모든 예배를 소중히 여겨야 하고 예배 시간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예상치 못했던 어느 날, 예상치 못했던 놀라운 은혜가 우리위에 폭포수같이 임할지 아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아무리 세상일이 중요하고 급하더라도 예배시간에 중요성을 깨닫고 예배를 빼먹는 일이 없기를 축원합니다. 예배를 빼먹는 것은 단순히 빼먹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를 빼먹는 것은 엄밀히 말하면 빼앗기는 것입니다.
마귀는 어찌하든지 우리가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하고 예배를 통해 임할 놀라운 은혜를 막으려고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특히 작심하고 은혜를 받으려고 나가려면 이상한 일이 터지게 해서 방해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일이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스티븐 코비라는 사람이 쓴 성공하는 사람들의 일곱 가지 습관을 살펴보면 성공하는 사람과 성공치 못하는 사람의 제일 큰 차이점은 하늘땅차이가 아니란 것입니다. 성공치 못하는 사람들은 늘 우선 급한 일부터 먼저 처리하고 시간 여유가 있을 때 중요한 일을 처리하나 성공하는 사람은 급하다고 다 하려고 하지 않고 덜 급하지만 중요한 일을 먼저 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습도 그렇치 않습니까? 신앙생활하는 우리 모습을 보세요. 예배드리는 일, 기도하는 일, 그리고 전도와 선교사역이 중요한 일이지만 급하지는 않기에 늘 급한 일, 돈버는 일, 사람 사귀는 일, 친척집안 행사 챙기는 일에 밀려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늘 급한 일만 하다보면 미래가 없습니다. 정말 중요한 일을 놓치고 마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의 일상생활 중에 주님 만나는 일이 최고로 중요한 일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교회 공동체 구성원과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는 시간이 최고로 중요한 시간이 된다면 여러분의 삶은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삶이 될 것을 믿습니다.
놀라운 은혜는 예상치 못했던 어느 날 임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저녁예배, 수요 예배도 소흘히 여기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 저녁예배 참석하는 모습을 보면 제가 가슴이 아픕니다. 더욱이 중직자들, 목장 강사들, 주일학교 교사들이 저녁예배를 너무 소흘하게 생각하는 것은 중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가지고 어떻게 목장식구들을 향해 설교를 한단 말입니까? “나는 바빠서 잘 못나가는데 여러분은 저녁예배 열심히 나가시기 바랍니다.” 하시나요? 자신이 저녁예배 나오지 못하면서 뭐라고 가르칩니까? 저녁예배보다 가족이 더 소중하니 주일은 낮 예배만 제대로 나와도 되고 수요예배는 안나가도 된다고 가르치나요? 목장 강사가 안나가니 목장장도, 목장 식구도 안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도마는 아마도 중요한 일로 그 자리를 비웠을 것입니다. 그는 그 나름대로 매우 중요한 일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중에 그 시간 그 자리에 없어서 주님과의 만남을 놓쳤고 결국 주님에게 책망을 당하는 결과를 가져 왔습니다. 기회는 여러 차례 오지 않습니다. 그 기회를 빼앗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3. 체험중심의 신앙인이었습니다.
도마는 아주 현실적인 체질이었습니다. 그는 솔직한 사람이었습니다. 보지 못한 것을 어떻게 믿습니까? 그런데 그가 늘 그런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자기를 찾아와 만나주고 만져보게 하자 곧바로 무릎을 꿇습니다. 그리고 그는 위대한 고백을 합니다. “주는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합시다. /주는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얼마나 멋있는 고백입니까? 손으로 만져보고 눈으로 확인한 후 그는 단단한 신앙인으로 변합니다.
결국 그는 오순절 성령을 체험한 후 멀리 인도까지 복음을 들고 갑니다. 당시에 인도까지 선교사로 간다는 것은 정말 위대한 일입니다. 그는 주님의 명령을 따라 땅 끝까지 갑니다. 그리고 인도 남부에서 순교를 당합니다. 지금도 인도 남부 지방에 가면 토마스 교회들이 수없이 많이 세워져 있습니다. 도마가 전해 준 그 복음을 통해 엄청난 열매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그 한번의 사건으로 의심 많은 도마라고 낙인이 찍혔습니다.
그러나 도마만큼만 해도 정말 대단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 도마만도 못한 신앙인이 아닙니까?
성도 여러분!
주님은 체험적 신앙을 수준 낮은 신앙으로 취급함을 아셔야 합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우리 믿음이 체험중심, 봐야 믿고 들어야 믿고 만져봐야 믿는 신앙이라면 어린아이 신앙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보지 못했으나 말씀으로 믿고 우리가 예수님을 만져보지 못했으나 그가 죽은 지 사흘만에 살아나셔서 오늘도 우리와 함께 계심을 믿는다면 바로 그것이 복있는 믿음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람의 감각은 視覺(시각), 聽覺(청각), 觸覺(촉각), 味覺(미각), 嗅覺(후각)등 5感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이 오감은 엄청난 한계가 있어 신뢰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시각은 빛으로 느껴지는 것인데 사람눈에 보이지 않는 자외선 적외선등 수많은 빛이 사람의 시각의 한계를 넘습니다.
청각은 소리를 느끼는 감각으로 20헤르츠에서 2만헤르츠 사이만 듣고 그이상이나 그 이하는 듣지 못합니다. 그런 연약함을 갖고 있음에도 안 보인다고 안 믿고 안 들린다고 안 믿을 것입니까?
그러기에 체험은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는 여기에 중요한 한 가지를 추가해야 합니다. 어찌보면 최고로 중요한 감각입니다. 그것은 영적 감각입니다. 이것을 통해 믿음을 갖기를 축원합니다. 우리속에 계신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예민한 감각을 갖게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느끼지 못하는 죄에 대한 감각을 갖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느끼지 못하는 성령의 감각들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런 감각을 의지할 때 우리 믿음은 놀랍게 쓰임을 받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장안의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이 원하시는 믿음은 어떤 믿음일까요? 약속을 제일로 받아들이며 믿는 믿음입니다. 체험을 앞세우는 신앙은 언제 변할지 모르는 신앙입니다. 그런 것을 가지고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세요. 그들은 수없는 체험을 했으면서도 그들의 믿음은 전혀 변화되지 않고 감사하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을 원망하며 불평할 때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것이 우리의 모습은 아닙니까? 우리는 체험보다는 약속을 붙들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언약을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성도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믿음은 혼자 세워지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함께할 때 우리 믿음이 성장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교회를 세우신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함께하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홀로 자라지 않기에 공동체를 통해 서로 교제하고 서로 도우며 함께 세워가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교회 공동체 속에서 온전한 믿음생활을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야만 제2의 도마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 가운데 의심 많은 도마라고 낙인이 찍힌 사람은 없습니까? 그럴지라도 이제라도 언약을 붙잡고 나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도마처럼 위대한 만남을 이룰 것이고 결국 위대한 인물로 쓰임을 받을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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