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든지 뜨겁든지 하라
계 3:14-22
얼마 전 가까이 지내는 신학교 교수님 한 분을 만났습니다. 다짜고짜 신학교 교수 노릇 못해먹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뜬금없이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답이 이렇습니다.
한 학기가 끝나면 학생들이 강의 평가를 한답니다. ‘강의를 얼마나 잘 준비했는지, 강의를 얼마나 성실하게 잘 진행했는지, 강의 방법은 어땠는지, 강의가 얼마나 도움이 됐는지 등등’ 학생들이 얼마나 예리하게 강의 평가를 하는지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답니다. 그래서 강의 평가서를 받아 읽고 나면 그날 밤은 잠을 자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랍니다.
그러면서 이분이 제가 부럽답니다. 담임목사는 목회 평가서 같은 것 받지 않으니까 신학교 교수들 같은 그런 스트레스를 받지 않아서 좋겠다는 것입니다.
제가 알아듣도록 답을 해 드렸습니다. “교수들은 그래도 학기가 끝나고 평가서를 받으니 얼마나 좋으십니까? 목회자들은 설교 끝나면 매번 바로바로 평가를 받습니다. 그리고 수시로 평가를 받습니다. 그래서 늘 교인들의 평가에 대한 스트레스를 달고 삽니다.” 이 분 말씀이 “그렇겠네요. 그래도 교수가 할 만하네요”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예민하게 반응하며 살아갑니다. 그 평가가 좋으면 기분 좋아하고, 그 평가가 나쁘면 마음 상해합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하든지 사람들의 좋은 평가를 받고자 애쓰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우리가 한 가지 놓치기 쉬운 것이 있습니다. 바로 주님의 평가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신앙평가서’, 우리의 ‘인생평가서’를 작성하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사람들의 평가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처럼 이런 주님의 평가에 예민하게 반응할 수 있다면, 우리는 지금과는 다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지금보다 훨씬 나은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주님께서 사도요한에게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편지를 보내라 명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 말씀은 사도요한이 주님의 명을 받들어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보낸 편지라는 말씀입니다.
이 편지의 내용을 살펴보면, 한 마디로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한 주님의 평가서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잘못한 점을 자세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잘못을 시정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 것까지도 자세하게 권고하고 있습니다.
이 편지를 직접 받아서 읽은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반응은 어땠을까요? 아마도 큰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크게 놀랐을 것입니다.
우선, 주님께서 자신들에 대해서 너무도 소상히 알고 계신다는 점에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15절을 보면,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7절을 보면,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저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는 말, 그들이 하는 행동 하나 하나 다 알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새삼 크게 깨달았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지금 불꽃같은 눈으로 자기들을 지켜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새삼 크게 깨달았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자기들이 이점을 잊고 있었다는 점도 깊이 뉘우치게 되었을 것입니다. 앞으로는 주님께서 자신들을 지켜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명심 또 명심하겠다고 다짐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이 점을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향해서도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네가 말하기를 ... 하도다”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우리도 다시금 주님께서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를 지켜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다음으로,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자기들에 대한 평가가 이토록 형편이 없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특히 16절 말씀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는 말씀은 정말 저들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저들에게 보내온 주님의 평가서에 기록된 자신들에 대한 주님의 평가는 최악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수우미양가’ 평가로 따져보면 ‘가’이고, 대학 평가 잣대로 따져보면 ‘F’입니다. 아마도 ‘수’는 안 되도 ‘우’ 정도는 되겠지 라고 생각하던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미’정도는 되겠지 라고 생각하던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받아본 평가는 ‘가’입니다.
우리는 어떨까요? 주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평가서를 보내신다면 우리의 성적은 어떨까요? 라오디게아 교인들처럼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는 최악의 평가를 받지는 않을까요? 아니면 이보다는 조금 나을까요?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에 대한 우리의 평가가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한 주님의 평가를 잘 받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미적지근한 신앙
그러면 라오디게아 교회가 왜 주님께 이토록 참담한 평가를 받게 되었을까요? 어떻게 하다가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버리리라”는 어찌 보면 저주에 가까운 평가를 받게 되었을까요?
주님께서 그 이유를 한 마디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15절을 보면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의 문제를 한 마디로 미적지근한 신앙이라고 지적하신 것입니다.
성경을 연구하는 학자들에 따르면 이 지적은 당시 라오디게아 지방의 지리적 환경을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지리적으로 라오디게아라는 도시는 두 높은 산악지대 사이에 난 거대한 계곡 한 복판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 계곡 중앙으로 양쪽 산악지대에서 발원한 물이 합류하여 만들어진 루커스 강이 라오디게아 도시 곁을 흐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라오디게아 북쪽 10킬로 지점에 솟아있는 히에라볼리 산악지대는 오늘도 세계적인 관광지로 유명한 ‘파묵칼레’라는 온천지대입니다. 여기에서 솟구치는 뜨거운 온천수가 계곡을 타고 라오디게아 방향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라오디게아 동쪽 약 14킬로 지점에는 골로새지역의 높은 고산지대가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높은 산에서 발원한 찬 물이 역시 계곡을 타고 라오디게아 방향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이 두 물줄기가 루커스 강에서 만나 라오디게아로 흐릅니다. 그래서 라오디게아 지역에서 이 루커스 강은 그야말로 온천수도 아니고 계곡을 흐르던 찬물도 아니고 미적지근한 물이 되고 만 것입니다. 게다가 이 지역에는 흙 자체도 석회질이 많아서 그 물을 그대로 마실 수가 없습니다. 그 물을 마셨다가는 토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지금 주님께서는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신앙상태가 마치 이 루커스 강물과 같다고 비유적으로 지적하고 계신 것입니다.
사실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영적 상태는 히에라볼리에서 솟구치는 온천수처럼 뜨거웠습니다. 원래 주님을 뜨겁게 사랑했고, 주의 일에 열심히 대단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골로새에서 흘러내리는 찬물과 섞여서 미적지근하게 식어버렸습니다. 세상일에 대한 관심이 섞여 들어오고, 세상 재미가 섞여 들어오면서 주님을 향한 열정이 미적지근하게 식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소진증후군’ (Burnout Syndrome)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의욕에 불타서 열정을 가지고 무엇인가에 몰두하던 사람이 언제부터인가 그 열정이 식기 시작하고 의욕을 상실하는 증상을 말합니다. 심리학적으로는 ‘감성 에너지라는 배터리가 완전히 방전되어 버릴 때 나타나는 뇌의 심각한 피로현상’을 말합니다.
대체로 소진증후군에 걸린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증상이 나타난답니다.
1. 잠이 잘 오지 않고 깊은 잠을 자지 못한다.
2. 집중력이 떨어지고 치매에 걸린 것처럼 깜빡깜빡 한다
3. 이전에는 그냥 넘어가던 일에도 짜증이 나고 화가 난다
4. 다 때려치우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
5. 관심을 갖는 대상에 대한 열정이 사라졌다
6. 사람을 단순한 대상으로 여기게 된다.
7. 일의 의미가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다.
신앙적인 차원에서 ‘영적소진증후군’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의욕에 불타서 열정적으로 주님께 헌신하던 사람이 언제부터인가 열정이 식기 시작하고 의욕을 상실하게 됩니다. 예배하는 일이 가슴 뜨겁고, 찬양할 때 눈물이 나고, 말씀을 들을 때 가슴 깊은 곳에서 아멘이 일어나고, 기도할 때 응답의 확신에 감사가 솟구치고, 주님의 명령에 주먹이 불끈 쥐어지면서 헌신을 다짐했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런 일들이 다 심드렁해집니다. 왠지 주님과의 거리가 멀어진 것만 같고, 주의 일에도 한 발 빠지고 싶고, 매사에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마음이 듭니다.
지금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영적 상태가 바로 이것입니다. 영적소진증후군에 빠져든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것을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고 책망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혹시 이런 영적 소진증후군에 빠져있지는 않습니까? 주님을 향한 열정이 예전 같지 않지는 않습니까? 교회에 대한 애정이 예전 같지 않지는 않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주님의 책망을 깊이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영적 무지
그런데 본문을 보면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영적 상태에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17절을 보면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한 마디로 말하면 영적 무지입니다.
그렇습니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더 큰 문제는 자신들의 영적 상태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는데 있습니다. 자기들이 영적으로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은 미적지근한 상태인데도 마치 자기들이 여전히 뜨거운 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지금 영적 소진상태에 빠져있는데 자기들은 여전히 영적으로 충만한 상태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연구하는 학자들에 의하면 여기에도 주님께서 라오디게아 지역의 특징을 비유로 하여 말씀하신 내용이 숨겨있다는 것입니다.
우선 라오디게아 지역은 여러 산업이 발전하여 도시 자체가 부유했습니다. 물론 교인들도 부자들이 참 많았고, 교회도 재정이 넉넉했습니다. 아마도 교인들은 이것을 다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실제로는 영적으로 가난하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다음으로 라오디게아 지역은 의료산업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었습니다. 특히 당시 안질환의 특효약이라 여겨지던 ‘브루기아 가루’를 생산 수출했습니다. 그런데 눈 건강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이 지역이 실제로는 영적으로는 소경 같아서 봐야할 것을 보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라오디게아 지역은 광택이 나는 검은 양모 생산지로 유명했습니다. 그래서 이 지역 사람들은 멋진 옷을 입기로 소문이 나있었습니다. 그런데 입는 옷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이 지역이 실제로는 영적으로는 벌거벗은 사람과 같았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눈에 보이는 외적인 일에 관심을 기울이다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일에 대한 관심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깊은 영적 무지에 빠져들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 자신들이 미적지근한 영적 상태, 영적소진상태가 된 것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어떤 분이 무척 건강했습니다. 그런데 곁에 있는 가족들이 볼 때 분명히 무엇인가 건강에 빨간불이 켜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디 아픈 것이 아니냐고 묻습니다. 병원에 가서 건강진단을 받아보라고 권합니다. 이분이 한사코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내 건강은 내가 잘 알아!”
얼마 후 상태가 심해 져서 가족들 성화에 못 이겨 병원에 갔습니다. 의사선생님 말씀이 “너무 늦었습니다.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만 쉽지는 않겠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이렇지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영적 무지에서 벗어나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나의 영적 상태를 정확하게 진단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차든지 뜨겁든지 하라
그러면 주님께서 라오디게아 교인들에게 무엇이라고 권면하셨을까요? 15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차든지 뜨겁든지 하라” 미적지근한 영적 상태를 벗어나서 차라리 차갑게 하든지 아니면 원래대로 뜨겁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에 한 가지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으려면 차라리 차든지 하라는 말씀을 오해하기 쉽습니다. 잘못 생각하면 미적지근하게 믿으려면 차라리 다 때려치우고 믿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뜻으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이 말씀은 일종의 역설입니다. 주님께서 이런 역설을 자주 사용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높아지려거든 낮아지라’, ‘살고자 하면 죽으라’ 같은 말씀입니다. 차라리 차가운 사람들은 자신이 차가운 줄 알기 때문에 뜨겁게 되도록 도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미적지근한 사람은 별문제가 없는 줄 알기 때문에 뜨거워지도록 도와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차든지 뜨겁든지 하라는 말씀은 한 마디로 미적지근한 상태에서 다시 뜨거운 상태로 나아가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다시 뜨거워질 수 있을까요? 주님께서 19절에서 그 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다시 뜨거워지려면 우선 회개해야 합니다. 뜨겁던 마음에 차가운 것이 섞여서 미적지근해 진 것입니다. 회개를 통해 차가운 것을 몰아내야 합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차가운 것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차단해야 합니다.
내 신앙을 식게 만드는 것들을 차단해야 합니다. 불신앙적인 것들이 내 안에 유입되지 않도록 차단해야 합니다. 세속적인 것이 내 안에 유입되지 않도록 차단해야 합니다. 사단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열심을 내야 합니다. 다시 영적으로 불을 붙여야 합니다. 뜨거운 온천수가 더욱 뜨겁게 심령 속에 흐르도록 해야 합니다.
내 신앙을 다시 뜨겁게 하는 일에 열심을 내야 합니다. 먼저 말씀에 열심을 내야 합니다. 말씀 읽는 일, 말씀 듣는 일, 말씀을 묵상하는 일에 더욱 열심을 내야 합니다. 다음으로 기도에 열심을 내야 합니다. 주님과 영적인 만남을 갖는 일에 열심을 내야 합니다. 골방으로 가서 주 앞에 엎드리는 일에 열심을 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의 경고의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차든지 뜨겁든지 하라!” 우리의 신앙이 식지 않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신앙이 식을 수 있습니다. 어느 틈엔가 찬 물이 흘러들어와 우리의 신앙을 식게 만들 수 있습니다. 부단히 경계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의 더욱 뜨거워지도록 열심을 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경고가 아니라 칭찬을 받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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