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추천 설교/박상훈목사

[스크랩]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 (막6:30~34)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 (막6:30~34)

 

예수님은 삼 년 동안의 공생애를 사셨습니다. 그 기간 동안 예수님은 날마다 계속해서 놀라운 이적들을 행하셨습니다. 그래서 요21:25 말씀처럼,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들을 낱낱이 기록한다면, 이 세상이라도 그 기록된 책들을 두기에 부족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른바 “오병이어 이적”의 서론에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오늘 본문 34절이 밝히는 것처럼, 예수님이 그와 같이 놀라운 이적을 행하신 것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에, 어떠한 이적이라도 행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예컨대 마귀가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했을 때, 예수님은 얼마든지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실 수가 있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실 수도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 한번도 그런 식으로는 이적을 행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적을 행하신 것은 오로지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긍휼을 베푸실 때만, 그의 권능을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귀신을 내쫓으신 것도 귀신 들린 사람을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병을 고치신 것도 병든 사람을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죽은 자를 살리신 것도 죽은 자의 가족들을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엡2:4 말씀처럼, 하나님은 긍휼이 풍성하십니다. 예수님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의 모습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긍휼이 풍성하시기 때문에, 언제나 나를 불쌍히 여기신다는 사실을 이 시간 다시 한번 깊이 깨닫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예수님이 못난 나를 불쌍히 여기시듯이, 나도 늘 모든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살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오늘 본문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예수님이 어떤 식으로 나를 불쌍히 여기시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나에게 귀를 기울이십니다(30절).


막6:30 사도들이 예수께 모여 자기들이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고하니


사도들이 전도 여행에서 돌아와, 예수님에게 모였습니다. 사도들이란 예수님의 열두 제자를 가리킵니다. 제자라는 말은 스승에게서 배움을 받았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반면에 사도라는 말은 스승으로부터 보냄을 받았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막6:7에서 예수님은 그의 열두 제자를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둘씩 짝지어서, 갈릴리의 각 마을로 보내셨습니다. 이 때 사용된 동사 “보내다”에서 나온 명사형이 바로 “사도”입니다. 사도라는 단어의 뜻은 “보냄을 받은 자”(sent one)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열두 제자들, 곧 사도들을 보내시면서, 그들에게 권능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는 권능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권능을 행하신 대로, 그들도 권능을 행했습니다.

아울러 막6:12에서 보는 바와 같이, 예수님의 제자들은 나가서 회개하라고 전파했습니다. 이것은 막1:15 말씀이 밝히는 대로, 예수님이 전파하신 내용을 압축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이 가르치신 대로, 그들도 나가서 가르쳤던 것입니다.

막6:8~9에서 예수님이 명하신 대로, 그들이 나갈 때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배낭이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아니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신고 있는 신 이외에는 따로 신을 가지지 아니했으며, 여분의 옷도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눅22:35 말씀이 밝히고 있듯이, 그들에게는 전혀 부족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의뢰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친히 그들과 함께 하시면서 그들의 삶과 사역을 전적으로 돌보셨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들이 얼마 동안 전도 여행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밝히지를 않습니다. 아마도 몇 주는 족히 지났을 것입니다. 단 며칠 동안 여행할 것이라면, 예수님이 그들에게 신만 신고 두 벌 옷을 입지 말라고 명하실 필요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이제 그들은 사명을 다 마치고,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되돌아왔습니다. 오늘 본문 32절을 보면, 그들은 그 곳에서 배를 탔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그 곳은 마9:1 말씀처럼, 예수님의 본 동네라고 불리는 갈릴리의 해변 마을 가버나움이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30절 말씀으로 되돌아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 곧 사도들이 예수님에게 다 모였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예수님에게 고했습니다. 여기서 “낱낱이”라는 단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은 둘씩 짝지어졌으니까, 도합 여섯 팀입니다. 그들은 차례를 따라서, 자기들이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예수님에게 고했습니다. 하나도 빠짐없이 다 아뢴 것입니다. 그 때마다 예수님은 일일이 그들에게 귀를 기울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그들이 고하기 전에, 이미 예수님은 그들이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낱낱이 고할 때, 예수님은 일일이 그들에게 귀를 기울이셨던 것입니다.

좋은 일이 있습니까? 예수님의 은혜인 줄 알고, 예수님에게 아룁시다. 예수님은 기뻐하시면서, 나에게 귀를 기울이실 것입니다. 어려운 일이 있습니까? 낙심하지 말고, 예수님에게 아룁시다. 예수님은 나를 불쌍히 여기시면서, 나에게 귀를 기울이실 것입니다.

신4:7 말씀처럼, 내가 하나님에게 기도할 때 하나님은 나에게 가까이 하십니다. 시28:6에서 하나님이 다윗의 간구를 들으신 것과 같이, 또한 행10:31에서 하나님이 고넬료의 기도를 들으심과 같이, 하나님은 언제나 내 곁에서 나의 기도와 간구에 귀를 기울이십니다. 

찬송가 337장 1절입니다. “내 모든 시험 무거운 짐을 주 예수 앞에 아뢰이면, 근심에 싸인 날 돌아보사 내 근심 모두 맡으시네. 무거운 짐을 나 홀로 지고 견디다 못해 쓰러질 때, 불쌍히 여겨 구원해 줄 이 은혜의 주님 오직 예수.”

또한 찬송가 539장 1절입니다. “너 예수께 조용히 나가 네 모든 짐 내려놓고, 주 십자가 사랑을 믿어 죄 사함을 너 받으라. 주 예수께 조용히 나가 네 마음을 쏟아노라. 늘 은밀히 보시는 주님 큰 은혜를 베푸시리.” 참으로 긍휼이 풍성하신 예수님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에게 낱낱이 아룁시다. 예수님은 일일이 나에게 귀를 기울이십니다. 예수님은 나를 불쌍히 여기시며, 나에게 풍성하신 긍휼을 베푸실 것입니다. 이와 같이 날마다 매 순간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장차 우리는 예수님 앞에서 나의 모든 삶을 낱낱이 고하게 될 것입니다. 그 때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도록, 늘 사명에 충성합시다. 예수님을 본받아, 남들을 긍휼히 여깁시다. 그리해서 그리스도의 날에, 우리 모두 예수님께로부터 큰 위로와 칭찬을 받기 바랍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나의 필요를 이해하십니다(31~32절).


막6:31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


예수님은 사도들이 전도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그들에게 잠깐의 쉼이 필요함을 아셨습니다. 사실 그들은 고단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먹을 양식을 준비해서 떠났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또한 막6:10 말씀처럼, 그들에게 잠잘 곳이 정해져있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 이레로 예비하신 곳에서 잠을 자며, 여호와 이레로 공급하신 양식을 먹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힘써 사람들을 가르쳤습니다. 또한 그들은 더러운 귀신을 내쫓고, 각종 병을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는 권능을 행했습니다.

분명 그들이 가는 곳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막3:20 말씀처럼, 그들은 무리 때문에 식사할 겨를도 제대로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잠잘 시간도 충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연히 그들의 심신은 피곤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사도들이 예수님에게 돌아왔을 때도 사정은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에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사람들이 문제를 들고 와서 해결을 받고 가면, 또다시 다른 사람들이 문제를 들고 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들에게는 음식 먹을 겨를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피곤을 충분히 이해하셨습니다. 막4:38을 보면, 예수님도 피곤하실 때에는 배의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이 따로 한적한 곳으로 가서 잠깐 쉬기를 바라셨습니다.

한적한 곳은 사람들이 없는 곳을 가리킵니다. 막1:35과 막1:45을 보면, 예수님도 때로는 한적한 곳으로 찾아가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때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도 사람들이 없는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는 것이 필요함을 아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히4:15 말씀과 같이, 나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은 나의 연약함을 아시고 나의 연약함을 동정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피곤을 이해하시고, 그들에게 필요한 쉼을 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나의 필요를 이해하시며, 나의 필요를 채워주십니다.


막6:32 이에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에 갈새


사도들은 예수님과 함께 배에 올랐습니다. 몰려드는 무리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길은 배를 타는 것이었습니다. 적어도 배를 타고 가는 동안은, 그들이 음식을 먹으면서 잠깐의 휴식을 취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눅9:10을 보면, 이 때 예수님이 그들을 데리고 가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그들의 인도자가 되셔서, 그들을 배에 태우신 것입니다. 시23:2의 말씀처럼, 진실로 예수님은 자신의 양들을 쉴 만한 곳으로 인도하시는 선한 목자이십니다.

사도들 가운데 적어도 네 명, 많게는 일곱 명이 갈릴리 바다의 어부였습니다. 따라서 이 때의 배는 그들 가운데 한 명의 소유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배라는 단어 앞에 정관사가 붙어있어, 언제나 “그” 배가 예수님과 사도들을 위하여 쓰였음을 보여줍니다.

아무튼 예수님은 그의 열두 제자들을 데리시고 배를 타셨습니다. 그들을 태운 배는 무리를 떠나서, 따로 한적한 곳으로 향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행선지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눅9:10을 보면, 그들의 행선지가 벳새다라는 고을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벳새다는 자그마한 고을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바로 다음절인 35절 말씀이 밝히듯이, 벳새다 인근에는 빈 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을 데리시고 벳새다 해변에 배를 정박시킨 후에, 그 인근의 빈 들로 가시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벳새다의 빈 들에서 그의 제자들이 잠시 쉬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들이 전도 여행에서 막 돌아왔는데, 또다시 사람들에게 에워싸여 음식 먹을 겨를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때 예수님이 그들을 벳새다 빈 들로 인도하신 또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마14:13에 의하면, 예수님이 “들으시고” 배를 타셨습니다. 이 때 예수님이 들으신 내용은 그 앞 절인 12절에 나옵니다. 세례 요한이 분봉 왕 헤롯에게 목 베임을 당해서, 그의 제자들이 그의 시체를 장사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도 그 소식을 다 들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 때 예수님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음이 무척 아팠을 것입니다. 요1:37 말씀과 같이,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 가운데 더러는 본시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분봉 왕 헤롯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서, 예수님을 보고자 했습니다. 그는 자기가 목 벤 세례 요한이 살아났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죽이려고, 예수님을 보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때가 이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가버나움을 떠나 벳새다로 가셨습니다. 두 곳 다 갈릴리 바다의 북쪽 해변에 위치해있었습니다. 갈릴리 바다로 흘러내리는 요단 강을 가운데 두고, 요단 강의 서쪽에 가버나움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요단 강의 동쪽에 벳새다가 있었습니다. 

가버나움과 벳새다는 가까운 거리였습니다. 그러나 행정 구역은 서로 달랐습니다. 가버나움은 분봉 왕 헤롯이 다스렸습니다. 벳새다는 분봉 왕 빌립이 다스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헤롯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벳새다로 그의 제자들을 데리고 가셨던 것입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분봉 왕 빌립은 그가 다스리는 고을 벳새다에 율리아스라는 이름을 덧붙였습니다. 율리아스는 로마의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의 딸의 이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곳의 이름은 벳새다 율리아스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물론 분봉 왕 빌립은 로마에 잘 보이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이름을 바꾼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뒤에 나오는 45절을 보면, 이 곳 벳새다 율리아스의 건너편에 또 다른 벳새다가 있었습니다.

갈릴리 바다 서쪽에 있는 벳새다는 헤롯이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빌립은 자기가 다스리는 벳새다를 그 곳과 구별하기 위하여 벳새다 율리아스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아무튼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을 일단 안전한 곳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나의 필요를 아시기 때문에, 예수님은 여호와 이레로 모든 것을 준비하시고 나를 인도하십니다. 내가 피곤할 때, 예수님은 여호와 이레로 준비하신 쉼터로 나를 인도하십니다.

내가 위태로울 때, 예수님은 여호와 이레로 준비하신 피난처로 나를 인도하십니다. 내 마음이 아플 때, 예수님은 여호와 이레로 준비하신 큰 위로를 내게 베푸십니다. 그러므로 늘 예수님을 바라보며, 예수님을 신뢰하며, 예수님에게 모든 것을 맡기면서 살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나를 돌보십니다(33~34절).


막6:33 그들이 가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그들인 줄 안지라 모든 고을로부터 도보로 그 곳에 달려와 그들보다 먼저 갔더라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을 데리시고 한적한 곳으로 가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배를 타시고, 가버나움을 떠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과 함께 가급적이면 조용하게, 또한 사람들의 눈에 뜨이지 않게 그 곳을 떠나고자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 가버나움에 모여있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가버나움을 떠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요6:4 말씀처럼, 마침 유월절이 가까워 모든 고을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을 태운 배가 벳새다를 향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 즉시 젊고 건강한 남자들은 벳새다를 향하여 달음박질했습니다. 그 나머지 사람들도 가급적이면 빠른 걸음으로 벳새다를 향했을 것입니다.

반대로 예수님의 일행을 태운 배는 느린 속도로 천천히 벳새다를 향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배 안에서 음식을 먹으면서, 비록 잠깐이기는 하지만 모처럼의 휴식을 취했을 것입니다. 적어도 배를 타고 있는 동안만큼은, 무리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드디어 예수님이 타신 배가 벳새다에 이르렀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밝히는 것처럼, 달려온 사람들은 이미 그 곳에 먼저 와있었습니다. 또한 마14:13과 눅9:11 말씀과 같이, 예수님의 뒤를 따라서 그 곳에 온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러면 왜 많은 사람들이 다시금 모여들었습니까? 요6:2 말씀과 같이, 그들은 예수님이 병자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병을 고치기를 바랐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행하시는 권능을 구경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며, 예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그 곳으로 찾아온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순전히 이기적인 목적으로 그 곳에 왔을 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들을 어떻게 대하셨습니까?

“참으로 성가신 사람들이구먼. 이 곳에 배를 대지 말고, 저들이 쫓아오지 못할 만큼 먼 곳으로 옮겨가자.”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배에서 내리셔서, 그들을 만나주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그저 배 안에서 잠깐의 휴식을 취했을 뿐이었습니다. 그들에게 한적한 곳이란 잠시 배를 타고 있을 때뿐이었습니다.


막6:3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벳새다 빈 들에 큰 무리가 모였습니다. 오늘 본문 뒤에 나오는 44절 말씀을 보면, 그 곳에 모인 남자들의 수만 오천 명이었습니다. 여자들의 수도 그만큼 되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 곳에 모인 어른들만 해도 일만 명이나 되었습니다.

또한 요6:9을 보면, 그 곳에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러니 분명 그 곳에는 아이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하나만 낳아서 잘 기르자고 할 때가 아니었습니다. 자녀는 하나님의 축복이기에, 많은 자녀를 낳아서 기를 때였습니다.

그러니까 그 날 벳새다 빈 들에는 아무리 적게 잡아도 이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이만 오천 명, 아니 삼만 명은 족히 되었을 것입니다. 정말로 큰 무리였습니다. 예수님이 사역하신 삼 년의 기간 중에서, 이 때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예수님은 큰 무리를 보시고, 그들을 목자 없는 양 같이 여기셨습니다. 목자 없는 양은 살 수 없습니다. 목자가 푸른 풀밭과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지 않으면, 양은 굶어죽고 맙니다. 또한 목자가 돌보지 않으면, 양은 맹수의 밥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이 불쌍히 여기셨을 때, 그저 감정적으로만 동정하신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목자가 그의 양을 돌보기 위하여 혼신의 힘을 다하는 것처럼, 예수님도 친히 역사하시면서 그들을 돌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을 여러 가지로 가르치셨습니다. 눅9:11 말씀을 보면, 이 때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야기 하셨습니다. 세상 나라의 일이 아닙니다. 사람 나라의 일이 아닙니다. 언제나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일을 가르치셨습니다.

지금까지 그들은 목자 없는 양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들의 목자가 되셔서, 그들에게 생명의 양식을 공급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그들의 병도 고쳐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그들의 목자가 되셔서, 그들의 영과 육을 동시에 돌보셨습니다.

이상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예수님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예수님께 어떠한 모습으로 나아오든지 간에, 예수님은 결코 나를 외면하지 아니하십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기꺼이 나를 영접하십니다.

예수님은 나를 불쌍히 여기시며, 나에게 귀를 기울이십니다. 예수님은 나를 불쌍히 여기시며, 나의 모든 필요를 이해해주십니다. 예수님은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친히 역사하시면서 나의 영혼과 육체를 동시에 돌보아주십니다. 

이와 같이 나를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이 나의 선한 목자가 되심을 감사합시다. 날마다 나의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기쁨으로 예수님의 뒤를 따라갑시다. 그리해서 모든 일에 예수님의 돌보심을 받으며, 늘 예수님의 역사하심을 체험하면서 살아갑시다.

아울러 아직도 나의 주변에는 목자 없는 양과 같은 사람들이 많이 있음을 잊지 맙시다. 나는 그들에게 예수님의 향기요, 예수님의 편지요,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나를 통해서 그들이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못난 나를 불쌍히 여기시는 것처럼, 나도 그들을 불쌍히 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들에게 귀를 기울여줍시다. 그들의 필요를 이해해줍시다. 그들을 실제적으로 돌보아줍시다. 그리해서 그리스도의 날에 예수님께로부터 큰 위로와 칭찬을 받기 바랍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