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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잠30:7-9 *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3)

잠30:7-9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3)

 

욕심에 관한 우스운 이야기 둘을 해보겠습니다. 웃음 속에 교훈이 있는 이야기들입니다. 한 나이 많은 성자가 여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길을 걸어가면서 우연하게도 초면인 두 사람과 동행을 하게 됩니다. 한사람은 욕심이 많은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은 시기와 질투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한동안 함께 길을 갑니다. 갈림길을 만나 헤어지게 되었을 때, 성자가 두 사람에게 말합니다. 당신들 덕분에 여기까지 잘 왔습니다. 보답으로 내가 소원 한 가지씩을 들어드리리다. 무엇이든 말해보시오. 먼저 말하는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되 다음 사람에게는 그것의 배를 드리겠소. 두 사람은 아무도 먼저 입을 열지 않습니다. '내가 먼저 말하면 저 사람이 나보다 두 배를 받겠지. 암, 절대로 먼저 말해서는 안 돼' 저마다 이렇게 생각하고 입을 열지 않습니다. 상대방이 먼저 말하기만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시간이 꽤 흐르자, 기다리다 못해 욕심 많은 사람이 시기심 많은 사람을 을러댑니다. 네가 먼저 말해. 말하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 시기심 많은 사람이 화가 치밀어 먼저 입을 엽니다. 내 눈을 하나만 뽑아주시오. 이것이 그의 소원이 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욕심 많은 사람은 두 눈을 모두 뽑히고 장님이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육십 살 동갑내기 부부가 결혼기념일이 다가오자 부인은 하나님께 비행기 타고 외국여행 한번 하게 해달라고 간절히 빌었습니다. 응답이 왔습니다. 아들이 비행기 표와 호텔숙박권을 가지고와 어머니 그 동안 아버지 만나 고생만 하셨는데 이제 외국여행 한 번 하세요. 해서 부인은 신나게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러자 남편도 기도를 했습니다. 할망구 만나 지금껏 재미없게 살았는데 이제 꼭 30년만 젊은 여자와 함께 여행가게 해달라고 빌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다음날 아침 일어났을 때 남편은 90살 노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욕심이 뭔지요?)

 

아굴은 ‘야게’이라는 사람의 아들입니다. 그 이름의 뜻은 ‘수집하는 자’입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지만 그의 기도가 그를 유명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소박하게 두 가지를 하나님께 구하면서 죽기 전에 응답해 달라고 요청합니다.(7)

 

첫째,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소서!

둘째,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먹이시옵소서!

 

오늘은 그의 두 번째 기도를 깊이 생각해 보겠습니다.

 

둘째,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먹이시옵소서!

 

아굴이 기도한 두 번째 간구는 지나친 가난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부를 구한 것도 아닙니다. 그는 지나친 부도 두려워했습니다. 그는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자기를 먹여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것으로 만족하고 감사하겠다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신앙적 이유가 있습니다. 이 이유 때문에 아굴의 기도가 멋있고 좋은 기도가 된 것입니다. 그의 신앙적 이유를 보겠습니다.

 

①부하게 되면

 

돈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부자라고 다 악한 것도 아닙니다. 다만 아굴은 부하게 되면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너무 잘 알기 때문에 하는 소리입니다. 무슨 문제입니까? 부하게 되어 하나님을 모른다하거나 애굽의 바로처럼 여호와 하나님이 누구냐 할까 두렵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인간을 가장 잘 아신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또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신8:12-14) "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신8:17,18)

 

배부르게 되면 교만이 찾아와서 하나님을 잊게 하고 하나님 계신 그 자리에 자신과 돈을 둔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부자도 있습니다. 하나님 영광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 선한 사업에 부하고 선한 일에 힘쓰는 부자도 있습니다. 사명으로 알고 물질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착한 부자도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인 안정을 얻으면 게을러지기도 하고 나쁜 친구를 사귀고 향락을 즐깁니다. 돈이 많으면 교만하여 사람을 무시하고 돈 때문에 자기본위로 살고 이기적인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잊어버립니다. 아굴은 인간의 본질을 날카롭게 직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단적인 예입니다.

 

“도루묵”이라는 물고기는 “은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조선 선조 임금이 국난으로 인해 궁궐을 떠나 피신해 있을 때 식량이 귀하던 차에 마침 한 백성이 “묵”이라는 고기를 임금님께 바쳤는데, 임금은 그 맛이 기가 막혀 물고기의 이름을 “은어”라 부르도록 명령했습니다. 후에 난리가 끝나 궁으로 돌아온 임금은 은어의 맛을 잊을 수가 없어서 그 요리를 해오도록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다시금 산해진미로 입맛이 길들여진 임금에게 그 물고기가 맛이 있을 리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도루 “묵”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도록 했는데, 여기서 ‘도루묵’이라는 이름이 비롯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빈궁할 때와 풍요할 때의 마음가짐이 이렇게 달라지는 것입니다. 또 다른 예입니다.

 

조그만 공장을 경영하는 어떤 주일학교 선생이 얼마나 헌신적으로 충성하는지 공장일로 바쁘고 피곤해도 철저하게 기도하며 주일학교를 섬겼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복을 주심으로 점점 잘되어 공장을 확장하고 사원수를 늘리고 십일조도 10만원에서 100, 200, 300만원으로 올라갑니다. 그러자 십일조가 형식적인 감사로 바뀌고 공장 일에 바쁘다는 핑계로 교사직을 내놓더니 급기야 주일예배도 가끔 빠졌습니다. 그러자 하루는 목사님이 걱정 끝에 심방을 갔습니다. 성도는 목사님에게 공장의 바쁜 상황을 설명하면서 이 핑계 저 핑계로 목사님의 양해를 구하였습니다. 묵묵히 말을 듣고 있던 목사님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군요. 그러면 우리 함께 기도합시다.” 하면서 기도를 하시는데 “하나님 아무개 성도를 사랑하셔서 이렇게 큰 복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복으로 말미암아 너무나 바쁜 관계로 하나님의 일을 하지 못하게 되었고 너무나 많은 십일조를 하려고 보니 아까운 생각이 들어서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죄도 함께 범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공장이 어렵고 물질적으로 쪼들릴 때는 열심히 충성하며 봉사했는데, 주여! 어찌하면 좋겠나이까? 주님 원하오니 차라리 공장을 망하게 하사 바쁘지 않게 하시고 물질이 아깝지 않도록 수입도 예전처럼 적게 하여 주셔서 하나님만 의지하고 충성하는 성도로 바꾸어 주옵소서!”

 

인간이 얼마나 간사하고 어리석습니까? 우리의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아굴은 자기 자신을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부자가 되어 교만하여 하나님이 누구냐? 하는 것보다 차라리 가난한 게 낫다는 것입니다. 가난이 좋아서가 아닙니다. 이런 신앙적 이유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의 기도는 짧지만 깊은 여운을 우리에게 던져주고 있습니다.

 

②가난하게 되면

 

사람들이 원치 않지만 찾아오는 지나친 가난도 문제가 됩니다. 가난은 사람을 범죄자로 만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굴은 자신이 가난하면 죄지을 사람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너무 가난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힐까 두려워, 너무 가난하지 않게 해 달라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이라는 소설에서 주인공 장발장(Jean Valjean)이 왜 빵을 훔쳤습니까? 너무 배가 고파서입니다. 이렇듯 너무 가난하면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불의와 독재를 용납하게 될 수 있습니다. 양심도 진실도 잃어버리고 자신의 생존을 위해 비굴한 인간이 되기 쉽습니다. 가난하면 정당하지 못하게 남의 것을 탐내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을 믿는 성도가 가난에 허덕이는 것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 비웃음과 조롱거리가 될 수 있습니다. 아굴은 물질적인 가난이 두려운 것이 아닙니다. 물질적인 가난으로 인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손상을 입고,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하게 되어 종국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까 두려워 가난하게 되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가난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않도록 하나님께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아굴은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아굴은 꼭 많이 가져야만 행복하다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일용한 양식이면 족하고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자족과 감사에 행복이 있음을 그는 사도바울처럼 잘 알기 때문에 성숙한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디오게네스 콤플렉스’라는 게 있습니다. 헬라의 유명한 철학자 디오게네스 때문에 불리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사는 생활에 전적으로 만족합니다. 스스로 만족하고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은 그런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자기 집이라는 게 둥그런 나무통이었습니다. 이것을 데굴데굴 굴리면서 살아갑니다. 굴리다가 세우고, 가다가 세우고, 그러다가 거기 들어가서 웅크리고 잡니다. 그리고 또 굴리고 다니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조금도 부끄러움도 없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그를 찾아 방문하게 됩니다. 그리곤 얼굴이나 사는 모습이 너무 부러웠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왕이 아니면 당신이 되고 싶소. 그리고 당신의 소원이라면 뭐든지 들어주겠소. 그러자 유명한 이야기를 남깁니다. 예, 소원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인가? 그러자 “조금 비켜 주십시오. 내가 햇볕을 쬐는데 폐하께서 가리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디오게네스 콤플렉스입니다.

 

누가 누구를 부러워합니까? 왜 가진 것들을 만족치 못합니까? 이것이 바로 디오게네스 콤플렉스입니다. 만족하지 못함은 끝없는 욕심 때문입니다.

 

➀아담과 하와 보세요. 부족함이 없었지만 하나님 같이 되겠다는 욕심 때문에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실과를 따 먹지 않습니까? 다 주고 하나는 하나님 것이라 해도 그것마저도 가지려는 욕심이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십일조가 그렇습니다.

 

➁아간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마침내 40년 광야 생활을 마무리 짓고 여호수아의 인도 아래 요단강을 건너 꿈에도 그리던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들어는 갔지만 앞에 놓여 있는 문제는 가나안 땅의 일곱 족속을 쫓아내야 하는 정복 전쟁이었습니다. 그 첫 번째 전투의 상대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관문에 당당히 자리 잡고 있는 견고하고도 큰 여리고 성이었습니다. 이렇게 중요한 전쟁을 앞두고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승리의 확신을 주시면서 한 가지 절대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그것은 가나안의 첫 성인 여리고 성의 모든 전리품들은 첫 젓으로 하나님께 바쳐진 물건이니 아무도 그것에 손을 대서는 안 되고 모조리 불살라 첫 승리의 희생 제물로 하나님께 바치라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백성들도 아간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간은 전리품을 보자 욕심이 생겨 시날산(産)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銀) 200세겔과 50세겔 나가는 금덩이 하나를 훔쳐 자신의 장막으로 가져가 땅 속에 몰래 감추어 두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물건을 훔친 것입니다. 이로 인해 작은 성읍 아이성 전투에서 이스라엘은 패배하고 맙니다. 이 일로 아간 역시 백성들이 던진 돌에 맞아 죽게 됩니다. 그의 훔친 은덩이와 금덩이는 돌덩이가 되어 다시 날아왔고 그가 훔친 시날산의 아름다운 외투는 돌무더기가 되어 자신의 시신을 차갑게 덮게 되었습니다. 그가 죽은 곳을 ‘아골 골짜기(Valley of Achor)’라고 부릅니다. ‘환난의 골짜기’, ‘괴로움의 골짜기’란 뜻입니다. 욕심으로 인한 아간의 범죄는 그 자신은 물론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에게 큰 환난과 괴로움만 남기게 된다는 메시지를 오늘도 우리에게 잘 전해주고 있습니다.

 

➂이스라엘 백성들의 탐욕도 우리의 거울이 됩니다. 민11:4 “이스라엘 중에 섞여 사는 무리가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가로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

이스라엘 자손이 울며 고기를 달라고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5-6절 그 이유를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 정력이 쇠약하되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도다하니” 만나로는 만족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탐욕 때문입니다.

 

인간의 욕심은 한도 끝도 없습니다. 인간의 욕심은 마치 블랙홀(Black Hole)과 같습니다. 무엇을 가지면 계속 더, 더 원합니다. 탐욕이 있는 한 인간은 정말 만족할 수도 없고, 감사할 수도 없습니다. 탐욕이 만족도, 감사도, 행복도 삼켜 버리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 그리고 아간,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 “탐욕은 모든 것을 얻고자 하지만 결과는 모든 것을 잃게 만든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욕심을 버리고 자족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그러나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딤전6:6~8)

 

그러므로 우리는 부하면 부할수록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그분의 은혜를 되새기며 하나님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잘 지키고(신8:11) 살아야 합니다. 주신 재물을 풀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함으로써 자신의 소유한 재물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인정하는 청지기의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가난에 처해 있다면 낙담 가운데 빠지거나 비굴하지 말고 나태함과 안일함을 버리고 열심히 일함으로써 가난을 딛고 일어서기 위한 노력을 그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살후3:8,12)

 

성도 여러분, 우리는 가난 때문에 죄를 짓게 되거나 혹은 부유함 때문에 스스로 교만하여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현재의 삶에 자족하시고 감사하며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굴처럼 죽는 날까지 하나님의 영광과 신앙을 위해 품고 기도하는 기도제목 몇 개를 소유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출처 : 목포하늘비전교회
글쓴이 : †^머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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