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추천 설교/박영일목사

[스크랩] 눅15:11-32 * 아버지의 마음 (1)

눅15:11-32  아버지의 마음 (1)

 

미국 어느 시골 통나무집에 한 병약한 남자가 살았습니다. 그 집 앞에는 큰 바위가 있었는데 그 바위 때문에 집 출입이 너무 불편하고 힘들었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꿈에 나타나 "사랑하는 아들아! 집 앞의 바위를 매일 밀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부터 그는 순종하는 마음으로, 희망을 가지고 매일 바위를 밀었습니다. 8개월이 지났는데 회의가 생기고 이상한 생각이 들어 바위의 위치를 자세히 측량해 보았습니다. 1㎝도 옮겨지지 않았습니다. 8개월 이상의 헛수고가 원통해서 엉엉 울었습니다. 바로 그 때 하나님께서 찾아 오셔서 "사랑하는 아들아! 왜 그렇게 슬퍼하느냐?" 그가 말합니다. "하나님 때문입니다. 말씀하신대로 8개월 동안 희망을 품고 바위를 밀었는데 바위가 전혀 옮겨지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나는 네게 바위를 옮기라고 말한 적이 없다. 그냥 바위를 밀라고 했을 뿐이다. 이제 거울로 가서 너를 자세히 보라.” 그는 거울 앞에 서서 자세히 보니 자신의 몸이 병약한 남자의 모습이 아닌 근육질의 남자의 모습이 되어 있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밤마다 하던 기침이 없어지고 매일 기분이 상쾌했었고, 잠도 잘 잤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 이야기처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한 장난도, 어떠한 해도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유익을 위함이라는 사실을 항상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본심, 우리를 향한 그런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하며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철없는 아들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우리들이 잘 아는 말씀으로 철없는 둘째가 아버지 품을 떠나려는 강렬한 욕망 때문에 멀쩡히 살아 계신 아버지께 상속을 요구합니다. 그는 참으로 철이 없고 이기적입니다. 아버지의 아픔은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자기의 욕심만, 기분만 채우면 그만입니다. 결국 아버지를 이겨 먹고 자기 몫을 받아 먼 나라로 떠납니다.

 

여러분, 자식 이길 부모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부모는 자식에게 매번 집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져 주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항상 사랑을 많이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더 많이 하는 쪽이 져 주는 것입니다. 부부도 사랑을 더 많이 하는 쪽이 져줍니다. 하나님께서도 야곱에도 져줍니다. 그래 네가 이겼다 ‘이스라엘’이라 해라 하십니다.

 

여러분 잘 보세요. 아버지의 품을 떠나 대단한 일을 할 것 같아도 결국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허랑 방탕’합니다. 결국 돈 다 탕진하고 흉년 만나 돼지보다 못한 비참한 인생 되어 굶주려 죽게 되자 그 때서야 아버지가 생각나고 자신의 잘못을 깨달게 됩니다. 그는 살기 위해 큰 결심을 하고 용기 내어 아버지께로 돌아옵니다. 철없는 탕자에게서 배울 것이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밑바닥까지 내려가서 철이 좀 들어 아버지께 돌아오는 것입니다.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사55:7)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네가 불의함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졌느니라”(호14:1)

 

여러분, 이것만이 살 길입니다. 방주 밖에 있는 인생들이 사는 길은 방주 안으로 들어오는 것뿐이듯 죄인들이 사는 길은 예수님 안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죄 사함이, 영생이, 구원이 있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아버지의 마음

 

아버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아버지를 떠나고 싶어 하는 둘째를 보면서, 그리고 떠나는 아들의 뒤 모습을 보면서 마음 아파하시는 아버지입니다. 무엇이 부족하다고 아픔을 주고 간 자식에게 아버지의 마음은 향해 있습니다. 나간 날부터 돌아오기를 오매불망 기다리며 마음과 눈이 집 나간 둘째에게 향해 있습니다. 매일 기다리는 마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런 아버지의 마음을 여러분 아시기를 바랍니다.

 

기다리는 자식 거지가 되어 돌아오자 그를 보고 제일 먼저 느끼는 아버지의 감정이 무엇입니까? 측은히 여김입니다.(20) 내장까지 일렁일 정도로 마음이 아파서 견딜 수없는 애끓는 사랑으로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며 소리칩니다. 제일 좋은 옷을 입혀라.(아들로서의 권위와 지위), 손에 가락지를 끼워주라.(상속자로서의 자격), 신을 신기고(주인 됨을 인정), 살진 송아지 잡아 잔치하자 합니다.

 

여러분, 사랑 아니고는 이해가 불가능합니다. 사랑으로만 이해되는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그의 형은 이해가 안 됩니다. 기뻐하지도 않고 대문 밖에서 화를 냅니다.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 버린 자를 위한 잔치라니 이해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안에 시비지심만 있을 뿐 측은지심이 없습니다. 아버지 같은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울면 업어 줄께 울지 마라 달래고, 밥을 먹지 않으면 먹으면 돈 줄께 하며 달래어 먹이며, 집 나가면 애타게 찾고 그 자식 비유 맞추고 뜻 받아주어 들어오게 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나를 사랑하는 부모님입니다. 거지 되어 돌아오는 아들을 위해 잔치를 해 줄 사람이 이 세상에서 누구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버지입니다. 이런 사랑이 결국 그를 돌아오게 한 것입니다. 부모님께 사랑 받았다는 기억이 있는 자식들은 결코 잘못되지 않습니다. 요셉을 보세요. 아버지께 사랑을 많이 받은 그 사랑의 기억이 그 힘든 노예생활, 감옥생활도 이기게 했습니다. 부모님에게, 아니면 그 누군가에게 이런 사랑 받은 기억이 있다면 그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 사랑이 나로 힘든 세상을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 하나로 잘못한 자식, 아픔 주고 집 나간 자식을 기다립니다. 사랑 하나로 거지 되어 돌아온 자식 무조건 용서합니다. 그리고 제일 기뻐하며 그를 위한 잔치를 합니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24) 아들의 존재만으로, 살아 같이 있는 것만으로 아버지는 너무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여러분, 이 잔치의 주인공이 누구입니까? 둘째입니다. 사랑 아니면 말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이야기 하나 더 하겠습니다.

 

어느 농장에 병아리가 한 마리 있었습니다. 그 병아리가 병이 들어 시름시름 앓더니 급기야 죽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수의사가 진단을 하더니 암탉을 한 마리 잘 고아서 먹이면 낫는다고 했습니다. 주인은 수의사를 향해 정신 나갔냐며 막 화를 냈습니다.

“병아리를 살리려고 암탉을 죽이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라는 것입니다. 수의사가 병아리를 살리려면 송아지를 잡아 먹여야 한다고 할 때 그 말을 따를 농장 주인이 어디 있겠습니까? 더 나아가 병아리를 살리려면 하나 밖에 없는 농장주인의 아들을 잡아 먹여야 한다면 그 말을 받아들일 사람이 과연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살리기 위해 그 아들을 십자가에 달려 죽도록 하셨습니다.”

 

죄인들을 살리려 아들을 보내어 십자가에 죽인 십자가 사건이 상식적으로 여러분은 이해가 됩니까? 사랑 아니면, 은혜 아니면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고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님 품으로 들어오면 잔치의 주인공이요, 하나님의 기쁨이 다 되는 줄 믿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자녀 된 성도는 하나님의 본심,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려고 힘써야 합니다.

 

“항상 기뻐하라”라는 말씀이 여러분에게는 어떻게 들리고 와 닿습니까? 지금도 인간에게 가능한 말씀이냐, 불가능하다 너무 무리한 말씀이라고 말하고 계십니까? 이 말씀을 하신 하나님의 본심은 “나는 너의 기쁨이 내 기쁨이다. 너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다. 그러니 항상 기뻐해라. 내 뜻이다. 나는 너의 슬픔이 내 슬픔이고 너의 아픔이 내 아픔이니 너는 항상 기뻐해야 한다. 내 뜻이니라.” 이런 마음으로 우리를 향해 “항상 기뻐하라” 말씀하신 줄 믿습니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본심은 무엇입니까? 사단은 “그걸 먹으면 하나님처럼 되니까 먹지 못하게 하신 것이다.”(창3:5)라고 아담과 하와에게 말합니다. 생각할수록 너무 유치하지 않습니까? 마귀의 속삭임은 따지고 보면 참으로 유치찬란합니다. 하나님이 그 정도 밖에 안 된다고 믿습니까?

우리에게 주기 싫어하시고 주기 아까워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겠느뇨”(롬8:32) 다 주시는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주일성수와 십일조’ 하라는 하나님의 본심을 아십니까?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말3:10)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왜곡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생각을 이 말씀에 더하지도 마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 안 들고 버겁다고 빼지도 마시고 하나님의 본심을 읽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만약 자녀를 앞에 두고 정말 잘되기를 바라고 진실로 하는 말을 자녀가 왜곡한다면 여러분의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우리를 향해 십일조를 하라는 하나님의 본심을 순수하게 받아들이시고 그대로 순복하시기를 바랍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고후6:14) "멍에"란 시골에서 밭갈이 농사일을 할 때 소나 말의 어깨에 지우는 농사기구를 말합니다. 소나 말 등위에 멍에를 지우고 그 멍에를 밭갈이용 쇠붙이에 연결하여 짐승들로 하여금 끌고 가게 하면 아주 쉽게 밭갈이를 할 수 있습니다. 만약, 두 마리를 함께 같은 멍에에 연결시키면 훨씬 그 일을 빨리 쉽게 끝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두 마리를 함께 사용할 땐 반드시 소면 소, 말이면 말 동일한 두 마리를 사용하고 절대로 소와 말을 함께 섞어서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같은 종류의 소끼리는 생각이 같고 기질이 같아서 함께 일할 순 있지만 소와 말을 섞어 하면 서로 생각이 다르고 기질이 다르기 때문에 보조를 맞출 수 없어 일이 지연되고 엉망진창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믿는 자는 믿는 자와 결혼하라는 말씀입니다. 어떤 토를 달지 마시고 하나님의 본심을 헤아리기를 바랍니다. 천하에 지혜의 왕 솔로몬을 생각하면 하나님의 본심을 이해하실 것입니다.

“또 이르기를 옛적에 이스라엘 왕 솔로몬이 이 일로 범죄하지 아니하였느냐 저는 열국 중에 비길 왕이 없이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라 하나님이 저로 왕을 삼아 온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셨으나 이방 여인이 저로 범죄케 하였나니 너희가 이방 여인을 취하여 크게 악을 행하여 우리 하나님께 범죄하는 것을 우리가 어찌 용납하겠느냐”(느13:26,27)

 

지혜의 사람 솔로몬도 무너졌습니다.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본심을 헤아려 성실히 순복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 읽고 들을 때마다 말씀하신 좋으신 하나님의 본심을 헤아리고 이해하는 성숙한 성도들이 되어 은혜 되게 받고 기쁜 마음으로 순종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출처 : 목포하늘비전교회
글쓴이 : †^머슴^†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