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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애3:32,33 *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 (3)

애3:32,33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 (3)

 

‘여유’라는 좋은 글이 있습니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가야 할 날이 더 많기에

지금 잠시 초라해져 있는 나를 발견하더라도

난 슬프지 않습니다.

 

지나가 버린 어제와

지나가 버린 오늘 그리고 다가올 미래

어제 같은 오늘이 아니길 바라며

오늘 같은 내일이 아니길 바라며.

 

넉넉한 마음으로 커피 한 잔과 더불어

나눌 수 있는 농담 한마디의 여유

초라해진 나를 발견하더라도 슬프지 않을 것입니다.

그저 누릴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바랄 뿐입니다.

 

우리는 하루를

너무 빨리 살고 너무 바쁘게 살고 있기에

그냥 마시는 커피에도

그윽한 향기가 있음을 알 수 없고.

머리위에 있는 하늘이지만

빠져 들어 흘릴 수 있는 눈물이 없습니다.

 

세상은 아름다우며

우리는 언제나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지금 난 초라하지만

넉넉한 마음이 있기에

커피에서 나는 향기를 맡을 수 있고.

하늘을 보며 눈이 시려

흘릴 눈물이 있기에 난 슬프지 않고.

내일이 있기에 나는

오늘 여유롭고 또한 넉넉합니다.

 

여유가 있는 자만이 커피에서 나는 향기를 맡을 수 있듯 깊이 생각하고 기다리는 마음의 여유가 있는 성도만이 하나님 아버지의 본심을 읽을 수 있습니다. 넉넉한 마음으로 지난주에 이어 하나님의 마음을 배우며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하나님의 본심을 아는 사람들

 

성경에는 주어진 상황들이 최악의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그 중에서도 하나님의 본심을 깨달아 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①예레미야입니다.

 

바벨론에 의하여 예루살렘이 함락되었습니다. 대부분의 백성들이 바벨론으로 포로 되어 끌려갔고 예레미야와 함께 예루살렘에 남아 있던 자들도 정복자들의 포악에 시달렸습니다. 여인들은 굶주림을 참지 못하여 자식의 시체를 먹고,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은 성전에서 살육을 당했습니다. 남녀노소가 길거리에서 학살당하고, 처녀들과 소년들이 무참하게 칼에 맞아 죽었습니다.(애2:20,21).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의 파멸을 생각할 때마다 쑥과 담즙을 마시는 것처럼 그 고통이 극심하여 슬퍼하며 낙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중심에 회상한즉 오히려 절망 중에 소망이 있음을 발견합니다. 여호와의 본심을 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본심은 사랑이시라는 것입니다. 이 사랑 때문에 죄를 범한 유다를 징계하신 것이지 그들을 완전히 진멸하시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70년의 포로 생활이 끝나면 다시 고국으로 돌아오게 하실 것이고 그 70년의 포로 기간 동안에 유다 백성들은 회개하고 율법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나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마음을 예레미야는 알게 된 것입니다. 그는 더 이상 비참해질 수 없는 상황에서, 황폐와 고난과 슬픔의 참혹한 현장에서 하나님의 본심을 알고 그는 소망을 품고 전하고 있습니다.

"저가 비록 근심케 하시나 그 풍부한 자비대로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애3:32,33)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슬픔과 고통을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기쁨이 하나님의 기쁨이고 우리의 슬픔은 하나님의 기쁨이 아닌 슬픔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본심을 바로 안다면 그 어떤 상황과 절망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예레미야 선지자처럼 소망을 품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것은 내가 믿는 하나님의 본심을 바로 읽고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의중을 내 마음에 담아두고 그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 기뻐하시는 '믿음'인 줄 믿습니다. 이런 귀한 믿음을 소유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②요셉입니다.

 

야곱의 아들 요셉에게 주어진 상황들을 보면 정말 억울하겠다. 너무 억울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자기 의지와 상관없는 꿈을 꾸고 그 꿈 이야기를 한 것이 노예로 팔릴 정도의 잘못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는 형님들의 의해 종으로 팔려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10년 정도 합니다. 주인에게 인정받고 나름 안정된 생활을 한다 할 때쯤엔 주인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을 해 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인으로 타협하지 않고 득죄하지 않으려고 애쓰나 결국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죄인 아닌 죄인이 되어 감옥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의 인생은 꼬이고 악화되어 갔지만 그는 묵묵히 참아냅니다. 당한 일로 치자면 마음은 온통 상처투성입니다. 말로는 다 표현 할 수 없는 아픔을 가지고 살아야 했습니다. 오죽했으면 결혼해서 첫 아들을 낳자 이름을 “므낫세”이라 했겠습니까? 므낫세은 “하나님께서 나의 모든 고난과 나의 아비의 온 집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는 뜻입니다.(창41:51) 그가 고난과 아픔을 안고 험난한 세월을 보냈음을 잘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요셉이 고난 중에도 하나님의 본심을 알았는지는 잘 모르지만 그는 국무총리가 된 후에 하나님의 본심을 분명히 알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창45:7,8)

 

여러분, 우리는 요셉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하나는 , 하나님 앞에서는 의미 없는 고통, 아픔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통도, 아픔도 모두 소중하고 귀한 것입니다. 버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요셉이 받은 그 큰 상처들은 하나님의 본심을 알게 될 때 치유됨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아픔과 상처들도 하나님의 본심을 통해 치유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본심을 잘 말해 주는 찬송이 있습니다. ‘이 믿음 더욱 굳세라’는 복음성가의 가사 2절입니다.

주님이 뜻하신 일 헤아리기 어렵더라도

언제나 주 뜻 안에 내가 있음을 아노라

사랑의 말씀들이 나를 더욱 새롭게 하니

때로는 넘어져도 최후 승리를 믿노라

이 믿음 더욱 굳세라 주가 지켜주신다

어둔 밤에도 주의 밝은 빛 인도하여 주신다

 

언제나 하나님의 뜻 안에는 내가 주인공으로 있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본심인 줄 믿습니다.

 

③사도 바울입니다.

 

성경에 나온 인물들 중에서 아마도 하나님의 사람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본심을 제일 잘 알 것입니다. 그의 고백이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10:13)

 

하나님께서는 ①성도에게 감당 가능한 시련만 주신다는 것입니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보실 때 이 정도면 감당할 수 있다고 판단하시고 시련을 허락하신다는 것입니다. 시련으로 인해 죽거나 잘못되게 하시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 살리고 유익되게 하시는 참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②시험 당할 즈음에 피할 길을 내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시련을 능히 이길 것입니다. 넉넉하게 이길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본심입니다.

 

둘째,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무슨 말씀입니까? 좋은 것은 좋아서 좋고, 나쁜 것은 좋게 만들어 주시니 좋고, 하나님께서 이런 일, 저런 일을 모두 아울러서 반드시 하나님 보시기에 좋게, 기쁘시게, 선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우리들의 끝은 항상 해피엔딩입니다. 일의 끝을 아니 흔들림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본심을 아니 미숙함이 있겠습니까? 여러분도 사도바울처럼 하나님의 본심을 아는 성숙함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사도 바울에겐 자신을 괴롭히는 육체의 가시가 있었습니다. 보통 그의 가시를 안질 아니면 간질로 봅니다. 얼마나 아프고 고통스럽던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세 번 간절히 구했습니다. 기다리던 하나님의 응답이 왔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12:9) 그가 바라고 기대한 육체의 가시가 제거되는 응답이 아니었습니다. 한 마디로 병이 고침 받은 응답이 아니었습니다. 그대로 남아 있어 죽을 때까지 계속 그를 괴롭힐 것이라는 응답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크게 기뻐했습니다. 왜입니까? 하나님의 본심을 깨달아 알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선한 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괴롭히는 가시는 의미가 있고 사명이 있고 하나님의 본심이 담겨져 있는 가시였습니다. 하나님의 본심을 모를 때에는 고통만 주는 가시였는데 깨달고 보니 이제는 고통을 주는 가시가 아닌 주님의 은혜입니다. 몸에 지닌 은혜의 흔적이고 눈에 보이고 온 몸으로 느끼는 은혜인 것입니다.

 

먼저, 교만을 막아주고 겸손하게 하는 은혜였습니다.

 

바울은 어느 누구보다도 더 교만해질 소지를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우선 가문이 좋습니다. 8일 만에 할례를 받은 자로서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의 사람이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흠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당시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가말리엘 제자이며 율법에 흠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예수님을 믿고 난 다음에 셋째 하늘에 올라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습니다. 계시 받았다고 교주가 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도 얼마든지 자랑하고 자고해질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만하지 않게 하려고, 교만을 막아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하기 위해 육체의 가시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교만은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머물지 못하게 합니다. 있는 은혜와 능력도 떠나게 만들고 대신 그 자리를 패망과 심판으로 채우게 합니다. 그래서 바울에게서 교만을 막아주기 위해, 겸손하게 살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육체의 가시라는 안전장치를 그의 육체에 두신 것입니다. 이것을 깨달고 나니 고통을 주는 육체의 가시가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상황은 그대로입니다. 질병도, 통증도 그대로입니다. 오직 달라진 것은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본심을 알게 된 것뿐입니다.

 

다음으로, 바울로 기도하게 하는 은혜였습니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 ‘가시’입니다. 나의 힘으로도 능으로도 못하고 안 됩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찾게 되고 도움을 구하게 됩니다. 나로 기도하게 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는 것이 ‘가시’입니다. 이것이 가시의 사명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가시 때문에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가시는 우리를 항상 기도로 초대합니다.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약5:13)

마틴 루터는 “시련이 없고 모든 것이 순조로울 때가 가장 위험한 시련이다. 왜냐하면 그때 인간은 하나님을 망각하고자 하는 유혹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시련 없을 때가 가장 무서운 시련입니다. 시련이 있을 때에는 늘 하나님을 찾고 깨어지는데 시련이 없고 배부르면 하나님을 잊어버릴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여러 가지 고통이 다가오면 기도하라는 하나님의 신호 인줄 아시고 즉시 무릎 꿇는 지혜로운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의 능력을 머물게 하는 은혜입니다.

 

고후12:9절입니다. 에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여러분,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은혜는 병들었다가도 나은 것, 실패했다가도 성공하는 것, 내가 원하는 바가 성취되는 것, 주로 이런 은혜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은혜의 사람 사도바울이 말하는 은혜란? 고전15:10절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①나의 나 된 것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요 ②주님을 위해 다른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한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역설적이지만 차원 높게 본문을 통해 말합니다. ③“약함이 은혜이다.” 고통을 주는 가시까지도 은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육체의 가시를 은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9) 너에게 허락한 육체의 가시가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가 듣고 깨달아 이제는 약한 것이 자신의 자랑거리요 은혜라고 고백합니다. 강하고 좋은 것들은 분명 주님께 받은 은혜이며 그리스도의 능력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은혜는 이미 받은 은혜와 능력이 계속 내게 머물게 하는 은혜입니다. 은혜가 계속 은혜 되게 하는 은혜, 계속 머물게 하는 큰 은혜는 강함에 있지 않고 약함에 있다고 그는 역설하고 있습니다.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12:9,10)

 

여러분, 하나님의 본심은 우리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재앙도 아닙니다. 평안과 장래에 소망을 주는 것이고 우리에게 복을 주시며, 은혜와 평강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본심은 축복이요, 절망이 아닌 희망입니다. 불행이 아닌 행복이요, 손해가 아닌 유익입니다. 오직 사랑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본심을 모르고 이해하지 못하면 요나처럼 철부지가 되고 이스라엘 백성처럼 하나님을 불신, 원망하게 됩니다. 바리새인들처럼 말씀을 잘못 오해, 해석해 말씀 밖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 하나님의 본심을 알게 되면 예레미야처럼 절망과 슬픔 중에 소망을 품게 되고 요셉처럼 받은 모든 상처가 치유 받게 됩니다. 사도바울처럼 흔들림 없는, 수준 높은 신앙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본심을 잘 헤아려 성숙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 목포하늘비전교회
글쓴이 : †^머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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