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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욥3:1-10, 26 침체를 극복합시다.

욥3:1-10, 26  침체를 극복합시다.

 

한 때 한 TV프로그램에서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스피드 퀴즈라는 게임을 해서 전국적으로 히트를 친 적이 있었습니다. 할머니 뒤에서 어떤 낱말을 보여주면 맞은편에 선 할아버지가 그 단어를 설명해서 빠른 시간에 많이 맞추면 이기는 게임입니다. 한 번은 어떤 할아버지에게 ‘천생연분’이라는 단어가 제시되자 할아버지가 급한 김에, “당신과 나 사이” 하자 할머니가 총알 같이 일어나 뱉은 말 “웬수” 당황한 할아버지 손을 흔들어 대며, “아, 이 할망구야,넉 자야, 넉자” 할머니, 더욱더 자신만만하게 외친 말, “평생 웬수”

그러면 중년부부는 어떠할까요? 남편에게 보여준 카드에 쓰인 문구는 ‘사랑해’였습니다. 남편 : ‘평소에 내가 당신에게 자주 하는 말’ 아내 : ‘미쳤나” 남편 : “아니, 그것 말고, 내가 당신한테 늘 하는 말 있잖아” 아내 : (잠시 더 생각을 하다가) “돌았나”

 

여러분, Depression이란 말 들어보셨지요. ‘정서적 침체’, ‘의욕상실’을 말합니다. 용기와 희망과 자신감을 잃어버린 상태, 기운을 뺀다는 그런 뜻입니다. 마치 커피에서도 카페인을 뺄 때 ‘디카페’라는 말을 씁니다. 기존 박카스D에서 카페인 성분을 제외했다고 ‘박카스 디카페’라는 이름으로 출시했습니다. 이처럼 용기와 희망과 자신감을 잃어버린 상태, 또는 기가 꺾인 상태를 디프레션이라고 합니다. 좀 더 다양하게 넓게 풀이하면 이렇습니다. 침울한 감정, 실망감, 슬픔, 만성적 피로, 권태, 무관심, 분노, 죄책감, 영적 퇴보, 의욕상실, 신앙의 저하 등을 말합니다. 몸과 마음의 탈진을 뜻합니다. 그 동안 명랑하게 살던 사람이 어느 순간부터 울적하게 되는 현상을 디프레션이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기에 누구에게든지 이런 디프레션 현상은 찾아올 수 있는 것입니다.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나, 여러 가지 환경적인 압박감 때문에, 건강 때문에 어느 날부터 웃음을 잃어버리고 영성을 잃어버리고 삽니다. 특별히 힘든 상황이 오래 지속되다보면 디프레션에 빠질 수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렵고, 몸이 오랫동안 아프거나 만성적 질환이 계속되다보면 의기소침해질 수 있습니다. 또 하는 일이 잘 안 되고 백방으로 노력하는데도 계속하여 악순환 되다보면 의기소침해 지고 의욕상실에 빠지게 됩니다. 누구든지, 얼마든지 삶의 현실이 너무 오랫동안 힘들다 보면 침체될 수 있습니다.

 

욥을 보세요. 욥1-2장에서는 얼마나 욥의 훌륭한 점을 칭찬합니까? 욥이 얼마나 탁월한 영성을 가졌으면 하나님께서도 사탄에게까지 자랑하고 세상에 드러낼 만큼 순수한 믿음의 사람이라고 소개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허락하에 욥은 재산을 잃었습니다. 건강도 잃었습니다. 명예도 잃었습니다.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다 잃었습니다. 그래서 그도 인간으로서 정서적인 우울함과 영적 침체에 빠졌습니다. 더구나 하나님은 욥이 왜 그처럼 혹독한 시련과 고통을 당해야 하는지 단 한마디도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침묵 속에 왜 이런 인생의 혹독한 시련을 겪어야 하는지 이유도 모르고 목적도 모르는 고난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것들이 욥의 영혼을 더욱 가라앉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욥은 자신의 처지가 너무나 처량하여 깊은 침체 속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이렇듯 칭찬 받고 인정받은 믿음의 사람 욥도 힘든 상황이 계속되니까 침체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욥기의 또 다른 메시지입니다. 하물며 우리겠습니까? 얼마든지 침체될 수 있습니다.

 

욥기 3장을 자세히 보면 욥은 자학증세 현상으로 세 가지 부정적인 의문을 표출하고 있습니다.

첫째, 왜 내가 태어났는가? (1-10절)

둘째, 왜 내가 살아났는가? (11-19절)

셋째, 왜 내가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20-26절)

 

욥은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면서 내가 왜 이 땅에 태어났는지 항변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어머니가 자기를 출생할 때 차라리 죽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비관에 빠집니다. 더 나아가서 그는 지금처럼 처참하게 고생하며 사는 것보다 차라리 죽는 게 더 낫다는 염세주의에 빠져서 말합니다.(16) 자기가 태어날 때 어머니의 무릎이 자기를 받지 않았더라면 자기는 이미 죽어서 평안히 쉬고 있을 텐 데라고 우울한 탄식도 합니다.(12-13절) 그래서 욥은 너무 고통스러워 고통이 부재하는 영원한 세상을 더 부러워했습니다. 죽음이야말로 가장 안전한 도피처로 해석했던 것입니다.

 

인생이 너무 힘들다보니 욥은 자기 운명을 스스로 개탄하며 비관적 회의에 빠집니다. 그는 갈수록 깊은 슬럼프 상태에 도달합니다. 그래서 3장의 결론을 보면 얼마나 서글픕니까? 본문 26절의 결론을 보세요.

“평강도 없고 안온도 없고 안식도 없고 고난만 임하였구나”-개역한글

“내게는 평화도 없고, 안정도 없고, 안식마저 사라지고, 두려움만 끝없이 밀려오도다!”-개역개정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건 욥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런 현상은 누구에게든지 일어날 수 있는 현상입니다. 오늘 본문은 침체의 근본원인을 잘 가르쳐 줍니다. 침체의 근본적인 원인을 아시려면 저와 여러분들이 살면서 어떤 단어를 많이 쓰느냐를 잘 살펴보시면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1. 나에게 집중할수록 침체되기 쉽습니다.

 

은 ‘나’라는 말을 이 짧은 메시지에서 20번이나 계속해서 반복합니다. 욥기 3장은 온통 “나는, 내가, 나에게, 나를” 이라는 단어로 도배가 되어 있습니다. ‘내가 왜 이런 운명이냐, 왜 나에게 이런 불상사가 일어나느냐?’라는 질문을 수없이 반복합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생각과 기준을 “나”에게 집중할수록 어느 한 순간 우울해지고 의기소침에 빠집니다. 스스로 영혼의 어두운 밤(dark days)으로 들어갑니다. 먹구름 인생을 살게 됩니다.

 

기독교 사상가 파스칼은 이점을 깨우쳐줍니다. “불행의 원인은 늘 내 자신이 만든다. 몸이 굽으니까 그림자도 굽는다. 어찌 그림자가 굽는 것을 한탄할 것인가? 나 이외에는 아무도 나의 불행을 치유해 줄 사람이 없다.”

 

생각해 보세요. 어찌 그림자가 굽는 것을 한탄해야 합니까? 그림자가 굽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그림자를 만드는 내 몸이 굽은 겁니다. 여기에 근본적인 원인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파스칼은 나 이외에는 아무도 나의 불행을 치유해 줄 사람이 없다고 정확한 진단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상황에서도 나에게 초점을 맞추지 말고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거나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찾기를 바랍니다. 돌아온 탕자가 자신을 볼 때 아들이라 불릴 자격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눈으로 볼 때에는 죽었던 내 아들이 다시 살아온 것입니다. 귀한 아들입니다. 그래서 기쁨의 고백과 잔치가 열린 것입니다.

 

다윗 얼마나 놀라운 영성을 가진 사람입니까? 하나님이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하다고 한 사람입니다. 그런 다윗도 인생이 너무나 험난하고 수많은 어려움을 겪다보니까 영적 침체와 디프레션에 빠집니다. 그러나 그는 아주 넘어진 것이 아닙니다. 다윗이 영적 침체에서 헤어 나왔습니다. 비결은 간단합니다. “하나님만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만 집중하였기 때문에 그 영적 슬럼프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자기 영혼을 향하여 이런 역동적인 믿음을 선포합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께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시42:11) 초점을 나에게서 하나님께로 옮깁니다.

다윗은 시편 62편 5절에서도 이렇게 노래합니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대저 소망이 저로 좇아나는도다.”

 

나에게 집중하지 마시고 하나님께 집중하시기를 바랍니다. 나를 바라보지 마시고 전능자, 희망의 하나님을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바라보며 사는 만큼 우리는 우울함이 아닌, 명랑함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회의적인 삶이 아닌 희망적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비관적인 삶이 아니라 낙관적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빈곤의식이 아닌 부유의식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할렐루야!

 

 

2. 왜? 라는 부정적인 의문을 품을수록 침체되기 쉽습니다.

 

오늘 본문에 욥은 왜? 라는 말을 6번이나 반복합니다. ‘왜 내가 태어났는가? 왜 내가 살아났는가? 왜 내가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회의적인 질문을 반복하다 보니 스스로 위축되고 낙심합니다.  ‘왜’ 라는 부정적인 질문을 할수록 회의를 느끼게 됩니다. 부부 사이에도 대화하다가 “당신 왜 그래?” 얘들 성적을 보고도 “성적이 왜 이래?” 그러면 위축됩니다. 그러나 ‘어떻게’라는 단어를 써보세요. 그러면 희망적이 됩니다. 긍정적이 됩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애들아 성적을 올리려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 이렇게 하면 비판이 아니라 용기를 갖게 되고 부정이 아니라 긍정을 생각하게 되니까 더 나아 질 수 있습니다.

 

세계 보건기구의 보고에 의하면 현대인들 20명 중 한명은 우울증으로 시달리고 있다고 합니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먹구름 낀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현대인들에게 우울증은 보편적 정서적 질환이 되었습니다. 우울증을 너무 과민하게 해석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떤 심리학자의 표현대로 ‘우울증이란 마음의 감기에 불과하다.’ 여러분, 감기는 금방 고칠 수 있잖아요. 마찬가지로 마음의 감기, 영혼의 감기는 간단하게 치료받을 수 있습니다. 미국의 설교자 찰스 스윈 돌은 디프레션을 매우 긍정적으로 해석합니다.

“디프레션은 나를 남루한 옷을 입은 선지자로 만들어 준다. 처음에는 초췌하게 보이지만 어두운 골짜기를 통과하고 나면 하나님의 사람다운 영적 기개가 높이 드러나게 해준다.”참 멋진 해석입니다.

 

남루한 옷을 입은 선지자, 별 볼일 없는 선지자, 초라하게 보고 대수롭지 않게 보입니다. 그러나 어두운 깊은 골짜기를 통과하면서 영성이 높아집니다. 영적인 영향력이 있습니다. 감동이 있습니다. 깨달음과 성숙함이 있게 됩니다. 선지자로서 영적인 권위가 있게 만들어 줍니다. (간증) 배집사님 부부

 

하나님은 모든 아픔을 치료해 주십니다. 영혼을 소생시켜 주십니다. 치료 후에는 이전보다 훨씬 더 고결한 성품의 사람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성숙함과 진지함이 있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아침 위로의 성령, 회복케 하시는 성령님이 오셔서 우리에게 새로운 기운을 주시고 활력을 주시고 잃어버린 영성을 찾게 하여 주실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 은혜가 모두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 목포하늘비전교회
글쓴이 : †^머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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