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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성령 롬 8:26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성령

 

롬 8:26

 

   성경은 일반적인 책들과 구별됩니다. 형식도 그렇지만 특별히 내용이 더욱 그렇습니다.

   일반적인 책에서 창시자나 조상에 대한 내용을 다룰 때 영웅담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의 탁월한 능력이나 리더십을 주로 이야기합니다. 어떤 경우는 과장해서 초인적인 모습으로 그립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릅니다. 예컨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다룰 때 그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실수나 잘못도 그대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한 예로 아브라함은 자기 살겠다고 거짓말합니다. 그러는 중에 아내를 다른 남자에게 넘겨주고 말았습니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반복해서 똑 같은 잘못을 저지릅니다.

   아브라함은 모든 믿는 자의 조상입니다. 우리가 모델로 삼고 본받아야 할 믿음의 선조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를 실수하고 약점이 있는 연약한 인간으로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가 실수를 저지른 때를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전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만났고 말씀에 순종해서 가나안 땅에 들어온 이후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된 뒤에도 여전히 연약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을 만난 뒤에도 여전히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물론 우리가 예수 믿고 나면 새롭게 변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연약한 자였지만 예수 믿고 난 후 강한 자로 변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강한 자로 변한 것이 아니고 여전히 연약하지만 강할 수 있는 길을 찾았다는 점이 달라진 것입니다.

   일반적인 책에서 자서전을 쓸 때 자신의 자랑거리에 초점을 맞춥니다. 실수도 했고 약점도 있었지만 할 수 있는 대로 그런 점들은 생략합니다. 때로는 자기의 장점을 부각하기 위해 각색도 하고 과장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모세는 자기가 쓴 모세 오경에서 자기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썼습니다. 살인한 이야기, 살기 위해 도망친 이야기,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주저하며 머뭇거린 이야기, 심지어 하나님의 명을 어기다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 이야기 등을 있는 그대로 썼습니다.

   모세는 영적 지도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존경하고 높이는 위대한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연약함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가 자신의 연약함을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자신의 연약함 때문에 더욱 철저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았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신의 연약함을 잘 알고 사는 사람임을 강조합니다. 그 연약함 때문에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는 사람임을 강조합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이것입니다. 우리가 연약한 존재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연약함 때문에 더욱 철저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우리의 연약함

   그러면 우리의 연약함을 조금 더 깊이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우리는 때로 육체적인 연약함 때문에 힘겨운 시간을 보내며 살아갑니다.

   고후 12장을 보면 사도 바울은 자기가 육체의 가시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육체의 가시란 무엇일까요? 마치 가시가 몸에 박힌 것처럼 지속적으로 고통을 주는 질병을 말합니다. 정확하게 무슨 질병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만성병인 것 같습니다. 주의 일을 하는데 늘 몸이 아파서 힘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사도 바울은 주의 일을 하는데 이 질병 때문에 너무도 힘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것도 세 번이나 병을 고쳐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고쳐주시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인생의 마지막까지 그 연약한 육체를 이끌고 고통가운데 살아야만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세월이 흐른 뒤에 깨달았습니다. 자신이 육체가 연약했기에 하나님의 도우심만 철저하게 의지할 수 있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사도 바울처럼 육체의 가시 때문에 고통을 겪으며 살고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암과 투병하느라고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분이 있습니다. 또 어떤 분들은 고혈압이나 당뇨와 씨름하느라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또 어떤 분들은 갖가지 만성병으로 고통을 겪으며 살고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 분들 가운데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고쳐주십니다. 그러나 또 어떤 분들은 사도 바울처럼 계속 육체의 가시를 몸에 지니고 살아야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깨달음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 육체의 가시가 은혜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그래서 감사할 수 있게 됩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때로 마음의 연약함 때문에 힘겨운 시간을 보내며 살아갑니다.

   왕상 19장을 보면 엘리야 선지자가 연약한 마음 때문에 고통을 겪는 이야기가 기록되어있습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혈혈단신으로 갈멜산 위에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 850명과 영적 전쟁을 치러서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위대한 승리를 거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소식을 들은 왕비 이세벨이 엘리야를 죽이고자 했습니다. 엘리야는 두려운 나머지 도망을 칩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에서 남왕국 유다 끝자락인 브엘세바까지 도망쳤습니다. 아직도 두려워서 광야 길로 하루를 더 도망칩니다. 그리고도 무서워서 이제 로뎀나무 아래 주저앉아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차라리 죽게 해 달라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찾아오셔서 그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셨습니다. 그리고 새 힘을 불어넣어주셨습니다. 그래서 다시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우리 가운데도 마음이 약해서 힘겨워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실패의 아픔을 이기지 못해서 힘겨워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감당하기 힘겨운 현실 앞에서 두려워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다가 올 앞  날에 대한 불 안 때문에 염려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우울증과 마음의 깊은 상처 때문에 고통을 겪는 분들이 있습니다.

   기도하십시오. 하나님께 여러분의 마음의 연약함을 드러 내놓으십시오. 주께서 여러분의 연약한 마음을 어루만져주실 것입니다. 새 힘을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또 다른 연약함 때문에 힘겨운 시간을 보내며 살아갑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 문제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바로 기도의 연약함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그러니까 우리가 기도해야 할 텐데 기도하지 못하는 것, 기도하면서도 무엇을 위해 기도할지를 알지 못하는 것 그것을 연약함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 26장을 보면 기도의 연약함을 보여주는 구체적인 예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40절을 보면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이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에 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마지막 처절하게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그러시면서 제자들에게 함께 기도할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기도하지 못하고 잠들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사건은 십자가를 지셔야 하는 예수님 당신만의 문제가 아니라 당신을 따르던 제자들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저들도 기도로 이 사건을 준비하도록 당부하신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저들은 예수님처럼 기도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가 다가오자 저들은 주님을 부인하고 또 십자가를 뒤로하고 도망쳐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당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왜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는지 그 뜻을 몰랐습니다. 자기들이 왜 기도해야 하는지 몰랐습니다. 그리고 기도한다면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다가오는 영적 시련을 기도로 준비하지 못하고 넘어져버리고 만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기도의 연약함입니다.

   오늘도 기도하라는 말씀을 듣고도 왜 기도해야 하는지 모른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도대체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지 모른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조금 뒤에 들이닥칠 영적 위기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적인 잠을 자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가장 심각한 우리의 연약함입니다.

   우리가 이런 기도의 연약함을 잘 이겨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능력있는 영적인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이런 우리의 연약함들을 이겨낼 수 있을까요?

 

성령의 도우심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이런 연약함을 보고만 계시지 않으십니다.

   우선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시기 위해서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또 하나의 복음입니다. 연약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백성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성령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사실 복음의 시작은 ‘임마누엘’ 사건입니다.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원하시기 위해 유일하신 아들 예수를 이 세상에 보내주셔서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놀라운 역사를 체험하게 하신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요 1:14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우리가 임마누엘 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또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모습을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우리 곁에서 보혜사로 우리를 도와주신다는 것입니다.

   임마누엘로 우리 곁에 오셨던 예수님께서 부활승천 하신 뒤에 또 다른 임마누엘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요 16:7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 곁을 떠나실 것을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제자들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다른 보혜사를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분이 성령이십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오시는 것이 예수님께서 제자들 곁에 계시는 것보다 더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성령께서 믿는 사람 각 사람 속에 내주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각 사람의 연약함을 도와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언제든지 우리가 연약해서 주님의 도우심을 구할 때 도와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연약함을 극복할 수 있는 비결은 간단합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보혜사이신 성령의 도우심을 힘입는 것입니다. 우선 성령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어떻게 우리를 도우실까요? 본문을 보면 우선 성령께서 ‘탄식’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탄식한다’는 말은 성경 원어를 보면 ‘스테나조’ (stenazo)라는 말을 번역한 것입니다. 이 ‘스테나조’라는 말은 또 ‘스테나스’라는 말에서 왔습니다. 이 스테나스라는 말은 ‘좁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탄식한다는 말은 마음이 무엇엔가 짓눌려서 좁아진 상태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심각한 문제가 일어나서 마음이 짓눌리고 답답해서 숨을 쉬기도 힘이 들 정도로 계속해서 한숨이 나오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성령께서 우리 안에 내주하시면서 우리의 연약함을 보시면서 마음이 짓눌리고 답답해서 안타까운 마음에 탄식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이 마치 당신의 연약함인 것처럼 안타까워하시면서 탄식하신다는 것입니다. 중병에 걸린 자식을 보고 탄식하는 부모처럼 우리가 질병 때문에 고통을 겪는 것을 보시며 탄식하신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상처로 아파하는 자식을 보고 탄식하는 부모처럼 우리가 마음 아파할 때 탄식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연약해서 탄식하고 있을 때 우리만 탄식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보다 더 깊은 탄식을 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바로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이십니다. 우리가 성령의 탄식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탄식하시는 성령의 그 탄식소리를 마음으로 듣고 느낄 수 있으면 더 할 수 없는 큰 위로를 얻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성령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보시면서 탄식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중보기도를 드린다는 것입니다.

 

  저는 목회하면서 힘들 때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로 위로해 주시는 것을 체험하곤 합니다.

  오래 전입니다. 한 번은 너무 힘이 드는 일이 있어서 늦은 밤에 기도하기 위해 교회를 찾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캄캄한 밤중에 본당 안에서 기도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모 권사님이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 조용히 권사님 멀찍이서 기도하려고 앉았습니다. 이분의 기도가 너무 커서 본의 아니게 기도소리를 듣게 됐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저를 위해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눈물로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제가 힘들어 하는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그 밤에 정말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새 힘을 얻었습니다. 어려움을 이기고도 남을 큰 힘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제가 힘이 들어 기도하지 못할 때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중보 기도할 사람들을 세우시고 기도하게 하신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보시고 탄식하시면서 기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깨닫게 될 때 정말 큰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특히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데도 기도하지 못할 때 성령께서는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 대신 우리를 위해 기도하십니다. 우리가 기도하면서도 마땅히 기도해야 할 것을 기도하지 않고 엉뚱한 기도를 드릴 때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 대신 우리가 기도해야 할 그 기도를 드려주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 친히 기도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성령의 우리를 위한 기도 소리를 마음으로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는 정말 큰 위로를 얻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은 교회력으로 성령강림주일입니다. 2000년 전 초대교회 성도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할 때 성령이 강림한 사건을 기리는 날입니다. 그리고 그 날 이후 예수를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따라 성령 받은 것에 대해 감사하는 날입니다. 또한 보혜사로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과 동행할 것을 다짐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는 연약합니다. 그래서 늘 탄식하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 때문에 탄식하며 우리를 위해 기도하십니다. 이 사실을 깊이 깨닫고 성령의 위로와 능력을 덧입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