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성경 : 누가복음 19:41~44
오늘은 예수님께서 베다니를 출발해 감람산을 돌아 기드론 시냇가를 건너 예루살렘 동편 문으로 입성하신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구해 온 아직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군중들이 예수님의 뒤를 따르면서 소리쳤습니다. “찬양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서는 영광이라.”
군중들의 환호를 받으며 예루살렘에 입성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시가지를 보시고 우셨습니다. 예수님이 우시는 모습은 백성들의 환호와는 대조를 이룹니다. 사람들의 눈과 예수님의 눈은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 나귀 타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날 사람들은 예루살렘을 찬양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장차 이루어질 예루살렘의 패망을 내다보시며 슬퍼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이 패망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소돔과 고모라처럼 죄악이 관영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것일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쳤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에서만 예배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것은 성소단일주의 사상을 배경으로 합니다. 이스라엘은, 적어도 열두 살 이상인 남자들은 1년에 세 번 이상 예루살렘에 와서 예배를 드려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 성전 안에는 법궤가 있었습니다. 법궤는 하나님이 계신 곳의 상징입니다. 법궤를 모신 예루살렘 성전은 하나님이 계신 곳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은 가르침의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예루살렘은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기적의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장 11절에 “예수님이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다.” 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며 하나님의 기적의 역사가 일어나던 그곳이 바로 예루살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땅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땅에 가셨지만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예전에 비해 기독교의 문화를 쉽게 접하며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매체를 통해서 어디서나 들을 수 있을 정도 말씀의 홍수 시대를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여러분 누구나 쉽게 기독교 문화에 접해 산다고 해서 기독교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한신교회 교인으로 한신교회 버스를 나는 교인이라고 말하며 당당히 탄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마음 중심에 그리스도를 모시고 사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의 말씀처럼 마음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살아있어야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 문화의 중심지인 예루살렘 그 성전을 보시며 예수님은 우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향해 너희들은 기회를 잃어버렸다고 말씀합니다. 왜 예루살렘 사람들이 기회를 잃어버린 것일까요? 이스라엘은 율법을 귀하게 여기며 살았습니다. 율법을 통해서 구원을 받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여부에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이 판가름 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율법을 행하려고 하면 할수록 자신의 죄가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예레미야 31장 31절에서 “날이 이르면 내가 너희들과 새 언약을 세우리라. 이 새 언약은 돌에 새긴 언약이 아니라 너희 심비에 세우는 새 언약을 세우노라.” 말합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새 언약, 우리의 죄를 온전하고 깨끗하게 씻어줄 새 언약, 그 새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그 언약은 돌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마음에 세운다고 했습니다.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왔지만, 율법에 매여 있던 이스라엘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율법의 눈으로는 예수님을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자신의 율법의 잣대로 평가하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그 율법은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갔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율법의 한계인 것입니다. 과거의 전통과 습관에 머물러 있는 한 우리는 기회를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새로운 기회가 찾아와도 율법에 매여 있는 한 그것이 기회임을 알 수 없습니다.
기회를 잃는다는 것은 심판을 의미합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이시는 하나님께 불평합니다. 가나안 땅으로 곧장 가게 하지 않으시고 광야 길을 헤매게 하시는 하나님이 원망스러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불뱀을 보내셨습니다. 불뱀에 물린 이스라엘은 온 몸에 독이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모세가 하나님께 살려달려고 회개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모세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장대에 놋뱀을 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놋뱀을 쳐다보는 사람은 살아나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살 수 있는 길은 놋뱀을 쳐다보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즉 그 사람이 과거에 강도, 흉악범, 어떤 사람이든지 상관없이 예수님을 믿는 자는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기회를 붙잡는 것이 중요합니다. 기회를 붙잡으면 살지만, 기회를 놓치면 심판에 이르게 됩니다. 베드로후서 3장 9절에는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주님이 오심이 더딘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너희를 향하여 인내하시고 너희 중 아무도 멸망치 않고 회개해서 구원을 받게 하려고 하시는 것이다. 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기회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아무도 심판에 이르지 않기를 바라시는 분이십니다.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바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그 때를 분별하는 일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사도 바울의 말씀처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구원 받을 때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께어 그 때를 분별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일부터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다음 주일은 부활주일입니다. 매년 드려지는 형식적인 기간이 아니라 예수님을 마음 중심에 모시며 우리를 사랑하신 예수님을 몸소 체험하는 기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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