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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설교/이윤재목사

벧후1:1-11 풍성한 생명 2013.2.24.(일)

벧후1:1-11 2013.2.24.()

풍성한 생명

우리가 받은 최고의 은혜는 우리가 지금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걱정도 근심도 스트레스도 고난도 우리가 살아 있기 때문에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 있는 이유는 우리에게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자연적 생명과 영적인 생명입니다. 자연적 생명은 숨쉬고 움직이고 늙고 결국 죽습니다. 또 하나의 생명은 영적인 생명입니다. 이 생명은 하나님과 연결된 영원한 생명입니다. 하나님 모르는 사람은 육체적 생명만 가졌고 하나님 믿는 사람은 두 가지를 다 가졌습니다. 육체적 생명과 영적 생명, 이 두 생명은 모두 하나님에게서 왔습니다.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수도에 수도꼭지가 있습니다. 이 수도꼭지에 관하여 우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1940년대 중국 본토에서 모택동에게 패하고 대만으로 피신한 장개석 군대중에 그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북경에서 틀기만 하면 물이 콸콸 쏟아지는 수도꼭지를 보고 너무 신기했습니다. 그래서 철물점에서 가서 수도꼭지 하나를 사가지고 대만에 와서 그것을 벽에 박았습니다. 그리고 틀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수도꼭지에서 물이 나왔을까요? 나오지 않았습니다. 어러분은 우유를 좋아하십니까? 얼마전에 차타고 어디를 가는 데 누가 그럽니다. “목사님, 저것을 보십시오. 저곳이 우유가 나오는 곳입니다”. 쳐다보니 우유공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우유공장에서 우유가 나옵니까? 우유는 우유공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젖소에게 나옵니다. 수도꼭지에서 물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수원지에서 물이 나오듯 생명은 다른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게서 나옵니다.

 

우리의 최고의 소원은 예수님에게서 오는 풍성한 생명을 우리가 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입니다. 10:10, “도둑이 오는 것은 죽이고 멸망하려 함이지만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고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간신히 구원받기 위해 생명을 받은 것이 아니라 풍성히 누리기 위해 생명을 받았습니다. 문제는 이 풍성한 생명을 우리가 어떻게 얻느냐 하는 것입니다.

 

생명은 우리에게 주어졌다.

오늘 말씀에서 베드로는 하나님은 생명은 우리에게 이미 주어졌다고 말합니다. 3절을 보실까요? 벧후1:3,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다같이 주셨으니”. 생명은 우리가 창조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로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두 가지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 생명은 하나님의 영원한 능력입니다. 경건은 그것을 얻기 위한 우리의 본성적 갈망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도 주시고 경건도 주셨습니다. 문법적인 형태로 볼 때 단순부정완료형입니다. 이미 주셨고 그래서 지금 현재 나에게 있습니다.

 

저는 컴맹입니다. 다른 사람이 저를 도와주지 않으면 아무 것도 못합니다. 한번은 컴퓨터가 안나와서 목회자를 불렀습니다. 그가 와서 몇 번 만졌더니 금방 컴퓨터가 됩니다. 그 뿐 아니라 여기 저기 만지니까 많은 프로그램이 작동합니다. 제가 신기해서 물었습니다. “아니 이 컴퓨터로 그것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랬더니 그가 말합니다. “목사님, 아 컴퓨터는 본래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더니 다른 기능도 보여줍니다. 제가 또 물었습니다. “그것도 이 컴퓨터로 가능합니까?” 그랬더니 그가 말합니다. 목사님, 이것도 본래부터 가능한 겁니다.” 그는 웃으며 말했습니다. 제가 그의 말을 듣고 은혜받았습니다. “본래부터 되는 것입니다”. 본래 되는 것을 제가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이미 있는 것을 믿습니까? 언제부터 있었습니까? “본래부터 있었습니다”. 언제 왔습니까? “언제인지는 몰라도 과거에 이미 왔습니다”. 그래서 지금 어떻습니까?” “지금 내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을 어떻게 받느냐에 대해 두 가지 입장을 보여줍니다. 하나는 이식설이고 또 하나는 모방설입니다. “이식설”(implantation)은 하나님의 생명이 어느날 우리에게 임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노력하기도 전에 심지어 우리가 원하기도 전에 우리에게 은혜로 임하셨다는 것입니다. “모방설”(imitation)은 하나님의 생명은 우리가 노력해서 닮아가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은혜로 주시지만 우리가 애쓰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생명은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나에게 임한 것입니까? 내가 노력하고 애써서 얻는 것입니까? 둘 다 다입니다. 그러나 순서가 있습니다. 먼저 은혜로 임합니다. 3절 다시 볼까요? 벧후1:3,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다같이 주셨으니”.

 

태초부터 하나님안에 생명이 있었고 그것이 예수님을 통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나에게도 임했습니다. 어떤 과정을 통해 임했습니까? 십자가를 통해 임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흘리고 죽을 때 그 생명이 나에게 왔습니다.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자 마자 내 안에 예수님이 사시기 시작했습니다. 3: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안에 감추어졌슴이라”. 우리가 예수님안에서 죽자 그 순간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안에 임했습니다. 예수님이 죽고 내 안에 사시는 일이 동시에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죽자 예수님의 생명도 우리에게 임했습니다. 동시에 일어났습니다. 죽자 다시 살았습니다. 죽자 생명이 시작되었습니다. 동시에 일어났고 서로 바꿔치기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나안의 생명은 동시에 일어났습니다. 어떤 신학자는 이것은 생명의 신적 교환이라고 불렀습니다. 교환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자 바라바가 살고 예수님이 죽자 오른편 강도가 새 삶을 얻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것을 4절에서 설명합니다. 벧후1:4, “이로써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한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여기에 신의 성품이란 말이 나옵니다. “신의 성품이란 곧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참여한다라는 표현입니다. 참여한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이 말을 어떤 주석가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여기 넓고 큰 저수지가 있다. 농부가 어떻게 논에 물을 대나 궁리하다가 저수지에 파이프를 댓다. 물은 파이프를 통해 논으로 흘러갔다”. 농부는 저수지의 물을 받기 위해 파이프를 댓습니다.

 

저수지는 농부가 만들지 않았습니다. 저수지는 농부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습니다. 농부가 할 수 있는 것은 저수지를 만들거나 바꾸는 것이 아니라 파이프 하나 대고 물을 받는 것입니다. 저수지는 생명의 수원지입니다. 저수지는 넓고 큽니다. 하나님의 생명도 크고 넓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의 생명의 저수지에 파이프 하나 대고 그 물을 받는 것입니다. 그것이 참여한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할 뿐이지 그 생명을 만들거나 없애지 못합니다. 저수지는 우리에게 주어졌고 우리는 은혜로 거기에 접촉할 뿐입니다. 저수지가 생명이라면 파이프는 경건입니다. 생명은 하나님 자신의 능력이고 경건은 그것을 우리에게로 잇는 믿음의 통로입니다. 인간의 문제는 결국 하나님의 문제입니다. 인간이 고달프고 목마르고 힘든 것은 결국 하나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구나 하나님쪽으로 파이프를 댑니다. 그것이 우리의 본성이요 경건입니다. 문제는 생명도 경건도 하나님이 주셨다는 것입니다.

 

모방은 내가 노력해서 예수님처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하고 애쓴들 예수님처럼 될 수 있을까요? 2천년 교회사는 예수님을 닮고자 하는 사람들의 역사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예수님을 닮은 사람도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 없이 스스로 예수님처럼 되지는 않았습니다. 가장 예수님을 많이 닮았다는 분이 성 프란치스코입니다. 한번은 제자들이 그에게 말했습니다. “프란치스코여, 사람들이 말하기를 당신이 가장 예수님을 닮았다고 말합니다”. 그때 프란치스코가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내 속을 들여다 볼 수 있다면 여기 가장 큰 죄인이 여기 있다고 말할 것이다”. 프란치스코도 저수지는 아니었습니다. 그 역시 거기에 파이프 하나 대고 하나님의 주신 생명을 은혜로 받은 자였습니다. 그가 남들보다 더 많이 받은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그가 저수지는 아닙니다. 생명의 저수지는 은혜로 주어졌습니다. 거룩은 내가 노력해서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생명이 내 삶속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스왈드 챔버스가 말했습니다. “거룩은 예수님의 생명이 나의 삶을 통해 나타나는 것이다. 거룩한 삶의 경이로운 비밀은 내가 예수님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완전함이 나의 부패한 육체를 통해 은혜로 나타나는 것이다”. 289장이 이것을 잘 표현했습니다. “주 예수 내 맘에 들어와 계신 후 벼하여 새 사람되고, 주 예수 내 맘에 들어와 계신 후 망령된 행실을 끊고, 저 멀리 하늘 문 환하게 보임도 주 예수 내 맘에 오심”. 아멘. 이미 오셨습니다. 은혜로 우리안에 생명과 경건으로 오셨습니다.

 

여기에 우리가 더해야 한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또 하나의 생명의 원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미 받은 것에 더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5절부터 7절을 보실까요? 벧후1:5-7, “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여기서 중요한 말은 더하라입니다. 다같이 더하라”. 그러니까 하나님의 생명에 관하여 우리에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받는 것이고 또 하나는 더하는 것입니다. 받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고 더하는 것은 내가 보충하는 것입니다. “더한다의 원문은 에피코레게사테입니다. 이 말은 보탠다. 보충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의 문법적 형태는 2인칭 복수 능동태 부정과거 명령형입니다. 그러니까 너희들이 스스로 지금 무엇 무엇을 하라는 것입니다. 복수형입니다. 모든 사람이 그렇게 해야 합니다. 능동형입니다. 스스로 그렇게 해야 합니다. 현재형입니다. 지금 그렇게 해야 합니다. 명령형입니다.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합니다. 무엇을 합니까? 보태는 것입니다. 보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너희에게 이미 생명과 경건을 주셨으니 이제 너희는 생명과 경건이 풍성해지도록 스스로 힘써서 보태고 보충하고 보완하라는 것입니다. 만들라는 것이 아닙니다. 창조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은 창조되었고 이미 내 안에 있습니다. 없던 것을 있게 하라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것을 움직이게 하라는 것입니다. 3절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신 일이라면 5-7절은 우리가 할 일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은 주신 일이요 우리가 할 일은 더하는 일입니다. 일의 성격이 다릅니다. 하나님은 과거, 완료형으로 이미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는 현재 능동 명령형으로 지금 스스로 그것에 해야 합니다.

 

이어령교수가 쓴 젊음의 탄생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이어령교수는 우리가 잘아는 노래 하나를 부릅니다. “떳다. 떳다. 비행기. 날아라. 날아라. 높이 높이 날아라. 우리 비행기”. 이 노래는 우리 모두가 초등학교때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어령교수는 이 짧은 노래에서 많은 것을 끄집어 냅니다. “떳다 떳다 비행기, 날아라 날아라”. 비행기는 처음에는 뜨고 다음에 난다는 것입니다. 순서가 있다는 것입니다. 먼저 뜨고 다음에 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뜨는 것과 나는 것은 다릅니다. 어떻게 다릅니까? 뜨는 것은 외부의 힘에 의해 움직이는 것입니다. 공기나 바람에 의해 나도 모르게 움직이는 것입니다. 나는 것은 자체 힘으로 나는 것입니다. 비행기안에 있는 엔진이나 기름의 힘으로 나는 것입니다. 비행기는 바람에 의해 뜰 수 있지만 자기가 가진 힘으로 날지 않으면 비행기는 추락한다는 것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뜨는 것을 좋아합니다. 연예인, 배우, 정치인, 심지어 목회자까지 뜨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뜰 수 있지만 스스로의 힘으로 날지 않으면 곧 추락합니다.

 

하나님의 생명에도 뜨는 생명이 있고 나는 생명이 있습니다. 뜨는 생명은 하나님이 주신 생명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바람을 불면 누구나 뜹니다. 처음부터 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의 바람을 불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지 않기 위해 우리는 또한 날아야 합니다. 이것이 고전15:10절입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너무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은혜가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더 많이 수고하고 애썻습니다. 뜨고 날았습니다. 받고 보탯습니다.

 

생명의 받고 보태는 원리는 마치 이 이야기와 같습니다. 한 유대인 농부가 장작을 패는 데 데 그날따라 귀찮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오늘은 제가 매우 힘듭니다. 하나님이 대신 패주세요”. 하나님이 말씀했습니다. “네가 해라”. 할 수 없이 농부는 투덜거리며 장작을 패려고 도끼를 들었습니다. 막 도끼를 들자 하늘에서 번개가 번쩍 내리쳤습니다. 그리고 장작이 쫙 갈라졌습니다. 농부가 놀라서 하나님께 소리쳤습니다. “하나님, 깜짝이야. 벼락으로 갈라주셨네요. 그럴거면 왜 기다리셨어요?” 처음부터 갈라주시지“. 하나님이 말씀했습니다. “내가 할 수 있지만 네가 도끼를 들 때까지 내가 기다렸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다 하실 수 있습니다. 장작도 패주시고 사업도 해주시고 공부도 해주시고 목회도 해주시고 전도도 해주시고 하나님은 언제나 번개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도끼를 들때까지 기다리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박사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도서관에는 우리가 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큰 사업가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매일 출근하고 열심히 일하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목회자에게 위대한 설교를 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설교준비는 목회자가 해야 합니다.

 

어떤 목사님이 주일날 은혜로운 설교를 했습니다. 교인들이 많은 은혜를 받고 물었습니다. “목사님, 설교를 얼마나 준비하셨어요?”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60년 걸렸지요”. 목사님의 나이가 60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설교의 영감을 주시지만 그 말씀을 받기 위해 낑낑거리고 기도하며 준비하는 것은 목회자의 일입니다. 제가 그렇게 하고 있지 않습니까? 한 주간동안 제가 하는 일이 말씀준비하는 일입니다. 주일이 끝나면 쉬는둥 마는둥 그 다음 주 말씀 준비에 들어갑니다. 거의 전쟁입니다. 주일날 한 시간을 위하여 수많은 시간을 묵상하고 책을 읽고 새벽에 엎드립니다. 그 은혜를 헛되지 않게 위하여 더 많이 수고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 역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성경 창28장에서 야곱의 사다리를 보시나요? 그 사닥다리위에 있는 천사들에게 재미있는 것은 날개를 가지고 있지만 날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28:12절입니다.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위에 서 있는 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위를 오르락 내리락 하고”. 천사들은 날개가 있었지만 날지 않고 사닥다리를 한 계단 두 계단씩 오르고 내렸습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께 가는 길은 한번에 가는 길이 아닙니다. 반드시 한 계단씩 무릎으로 오르고 내려야 합니다. 이미 생명을 얻었지만 그 생명이 풍성하게 되는 것은 하루 아침에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저희 친척중의 한 분이 서울 근교에 집을 지었습니다. 한번 방문했더니 기계로 잔디를 깍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말합니다. “옛날에는 풀뽑는 것이 힘들었는 데 지금은 즐거워. 매일 뽑거든”. 그가 직장에 다니고 바쁠 때 가장 힘든 것은 잔디깍는 일이 었습니다. 너무 바쁘니까 한 달에 한번 정도 깍다보니 풀이 자라 깍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은퇴했고 시간이 많으니 매일 깍습니다. 매일 깍다보니 힘이 들지 않습니다. 매일 잔디를 깍으며 콧노래를 부릅니다. 어쩌다 하면 힘들고 매일 하면 쉽습니다. “옛날에는 풀뽑는 것이 힘들었는 데 지금은 즐거워. 매일 뽑거든”. 죄와 싸우는 것도 매일하고, 기도하는 것도 매일하고, 선행하는 것도 매일 하면 쉬어 집니다.

 

무엇을 더할까?

, 그러면 풍성한 생명을 위해서 우리가 무엇을 더 해야 합니까? 다시 벧후1:5-7을 봅니다. “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모두 8가지입니다. 유대인은 8이라는 숫자를 좋아합니다. 할례도 낳은 지 8일만에 받습니다. 유월절, 장막절도 8일동안 축제합니다. 결혼식도 8일동안 진행합니다. 8이 소중할까요? 8이란 한 주간이 지난 다음 날입니다. 그러니까 지난 월요일에 태어났으면 이번 주 월요일 지나 화요일이 8일째입니다. 8은 한 주간이 지나고 다시 돌아온 첫날입니다. 새로운 시작입니다. 풍성한 생명은 늘 새로운 출발입니다. 한 주간의 사이클이 돈 후 다시 시작한 새 날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은 은혜로 받으며 매일의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것이 영적인 삶입니다.

 

. 8가지를 봅시다. 먼저 순서를 보십시오. 믿음, , 지식, 절제, 인내, 경건, 형제우애, 그리고 사랑. 특징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시작해서 사랑으로 마칩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생명의 시작은 믿음입니다. 그리고 완성은 사랑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생명의 반석입니다. 믿음이 견고하면 영적 생명도 견고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흔들리면 다 흔들립니다. 완고와 견고는 다릅니다. 바로는 완고했고 모세는 견고했습니다. 자기를 의지하면 완고하게 되고 하나님을 의지하면 견고하게 됩니다. 샤를르 드 푸코라는 사람이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여 서면 완고하게 되고 하나님앞에 겸손히 서 면 견고하게 된다”. 고전15:58절입니다.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견실하며 흔들리지 않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반석으로는 삼는 것입니다. 풍성한 생명은 견고한 믿음위에 서 있습니다.

 

믿음으로 시작된 영적인 삶은 으로 나아갑니다. 덕은 요즘말로 도덕성입니다. 선한 삶입니다. 선한 행실입니다. 딤후3:17절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간신히 지옥형벌 면하기 위해 예수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모든 선한 일을 행하려고 믿습니다. 그리고 선한 일을 하다보면 믿음이 더 풍성해 집니다. 2천년 교회사에 흘렀던 세 가지 영적 주제가 있습니다. 올바른 기도-옳바른 믿음- 올바른 실천입니다. . 사람이 교회에서 수도원에서 기도합니다. 기도하면 할수록 더 좋은 믿음의 사람이 됩니다. 옳바른 믿음은 올바른 기도에서 옵니다. 그래서 위대한 교부, 신학자, 개혁가는 다 위대한 기도자였습니다. 그러면 믿음에 굳게 서면 어떻게 됩니까? 실천하게 됩니다. 마틴 루터가 말한대로 믿음은 은총의 아들이요 선행의 어머니입니다. 은총은 믿음을 낳고 믿음은 선행을 낳습니다. 그런데 올바른 삶을 살다보면 굳어집니다, 딱딱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때 엎드립니다. 그것이 기도입니다. 그러니까 영적 생활에서 기도-믿음-실천는 사이클처럼 돌아갑니다. 생명을 풍성하게 하기 위해 믿음만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천이 필요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지식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세상적 학문을 아는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영생은 곧 하나님 지식입니다. 하나님을 많이 알수록 생명은 풍성해 집니다. 무식해서는 진실로 영적일 수 없습니다. 예수님 시대 유명한 랍비 힐렐이 말했습니다. “머리가 빈 사람은 죄를 두려워 하지 않고 무식한 사람은 진실로 경건할 수 없다”. 구약의 호세아시대 사람들은 많은 제사를 드렸습니다. 수많은 양과 소를 잡아 성전에서 부지런히 예배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탄식했습니다. 4:6,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하나님에 대해(about) 아는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을(of) 아는 지식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많이 알수록 생명은 풍성해집니다.

 

다음은 절제를 더해야 합니다. 절제는 헬라어로 엔크라테이아라고 합니다. 이 말은 안에를 뜻하는 전치사 을 뜻하는 크라토스가 합쳐진 말입니다. 그래서 절제는 직역하면 안에 있는 힘입니다. 보통은 힘이 밖에 있습니다. 속에 있는 것으로 밖으로 나오는 것, 그것을 우리는 힘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진실로 강한 힘은 안에 있습니다. 안에 두고 안쓰는 힘이 강한 힘입니다. 성령의 9가지 열매중 절제가 있습니다. 절제가 왜 성령의 은사인가 하면 우리가 가진 힘보다 성령의 힘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내가 가진 힘보다 성령의 힘이 강하면 그 힘이 내 힘을 누릅니다. 내 힘은 언제나 성령의 힘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래서 힘이 항상 안에 있습니다. 이것이 절제입니다. 하나님의 힘보다 내 힘이 강하면 그 힘을 함부로 쓰다가 생명력이 약화됩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삼손입니다. 삼손은 본래 영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좋은 믿음의 가정에서 기도하는 부모를 모시고 태어났습니다. 그는 술마시지 않고 머리에 칼도 대지 않는 나실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느날부터 힘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육체적 완력에 쓰고, 먹고 마시는 쾌락에 쓰고, 그리고 여자에게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안에 있던 힘이 점점 밖으로 나가 안에 있는 생명이 죽기 시작했습니다. 결국은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성령의 힘으로 내 힘을 눌러야 합니다. 그래서 그 힘이 우리 안에 있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생명이 풍성해집니다.

 

다음에 인내를 더해야 합니다. 인내는 헬라어로 휘포모네라고 합니다. “휘포아래입니다. “모네머무르다. 서다라는 뜻입니다. 안내는 결국 아래에 서 있는 것입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아래에 서 있으면 참게 됩니다. 사울의 쫓김받던 다윗이 끝까지 믿음을 지켰던 이유는 그가 시험당할 때 언제나 하나님아래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그늘이 많이 나온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그늘은 나무밑에 있습니다. 인내도 하나님아래 있는 것입니다. 91:1,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아래 사는 자는 복이 있나니”. 고난은 우리를 전능자의 그늘밑에 서게 합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고난이 올 때 오히려 안전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많은 환란가운에 승리했습니다. 하나님아래 서 있어야 안전합니다. 하나님아래 있으면 승리합니다.

 

다음은 경건을 더해야 합니다. 경건은 하나님께 가까이 가고자 하는 삶의 노력입니다. 요즘 말로 영적 훈련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연습이나 훈련굼나제라고 합니다. 이 말에서 짐나지움”, 체육관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경건은 체육관의 선수처럼 자기를 강하게 훈련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말한 딤전4:7-8,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하는 말입니다. 훈련은 우리의 영적 생명을 풍성하게 합니다. 540, “내가 매일 십자가 앞에 더 가까이 가오니”. 매일 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경건입니다. “형제우애는 함께 사는 사람들과 사랑하며 사는 것입니다. 서로 못 지내면 불행할 뿐 아니라 풍성한 생명을 누릴 수 없습니다. 생명은 사람들과 함께 누리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면 생명이 풍성해 집니다. 그래서 마지막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의 완성입니다. 사랑하면 우리의 생명이 풍성해 지고 생명이 풍성해 지면 사랑합니다. 사랑은 풍성한 생명의 완성입니다.

 

여러분안에 예수님의 생명이 있음을 믿습니까? 생명과 경건은 이미 하나님이 은혜로 여러분에게 주신 것을 믿습니까? 그러나 받은 것에 만족하지 말고 끊임없이 노력해서 모든 좋은 것을 더하시겠습니까?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우애를 그리고 사랑을 더하시겠습니까? 그리고 풍성한 생명을 누리겠습니까? 마치 사막에 심기운 푸른 숲처럼 우리 삶에 풍성한 생명으로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벧후1:1-11 2013.2.24.()

풍성한 생명

10:10, “도둑이 오는 것은 죽이고 멸망하려 함이지만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고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

생명은 우리에게 주어졌다.

벧후1:3,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하나님의 생명을 어떻게 받는가?

- 이식설(implantation): 하나님의 생명이 은혜로 우리에게 임하셨다.

- 모방설(imitation): 하나님의 생명은 우리가 노력해서 닮아가는 것이다.

 

벧후1:3,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다같이 주셨으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3: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안에 감추어졌슴이라”.

벧후1:4, “이로써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한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신의 성품에 참여했다”=“농부가 저수지의 물을 받기 위해 파이프를 댓다”.

 

오스왈드 챔버스, “거룩은 예수님의 생명이 나의 삶을 통해 나타나는 것이다. 거룩한 삶의 경이로운 비밀은 내가 예수님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완전함이 나의 부패한 육체를 통해 은혜로 나타나는 것이다”.

 

여기에 우리가 더해야 한다.

벧후1:5-7, “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더하라”=보태라. 보충하라.

 

이어령교수, <젊음의 탄생>. “떳다. 떳다. 비행기. 날아라. 날아라. 높이 높이 날아라. 우리 비행기”.

 

뜨는 것=외부의 힘에 의해 움직이는 것

나는 것=자체의 힘으로 나는 것

 

고전15:10,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

 

28:12,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위에 서 있는 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위를 오르락 내리락 하고”.

 

무엇을 더할까?

벧후1:5-7,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1) 믿음

샤를르 드 푸코, “하나님을 대적하여 서면 완고하게 되고 하나님앞에 겸손히 서 면 견고하게 된다”.

 

고전15:58,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2)

딤후3: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2천년 교회사의 세 주제: 올바른 기도-옳바른 믿음- 올바른 실천

 

(3) 지식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랍비 힐렐, “머리가 빈 사람은 죄를 두려워 하지 않고 무식한 사람은 진실로 경건할 수 없다”.

 

4:6,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4) 절제

절제=“엔크라테이아”=“안에 있는 힘

 

(5) 인내

인내=“휘포모네”=“아래에 서다

 

(6) 경건

경건=“굼나제”=“짐나지움”(체육관)

 

딤전4:7-8,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7) 형제우애

 

(8)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