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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설교/이윤재목사

골2:6-7 예수님께 뿌리내리기 2013.3.3(일)

2:6-7 2013.3.3()

예수님께 뿌리내리기

3월입니다. 새 봄이 시작되는 3, 3월이 축복의 계절이 되시기 바랍니다. 저는 교회에 가까운 곳에 삽니다. 한번은 제가 교회를 오는 데 다른 층에 사는 어떤 분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탓습니다. 그 분도 마침 교회나가는 중이서 제가 교회 가세요?” 하고 인사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다니는 교회가 꽤 멉니다. 그래서 제가 웃으며 말했습니다. “왜 가까운데 교회가 있는 데 왜 멀리 다니세요? 그 교회가 좋은가 봐요”. 그랬더니 그 분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사실 제가 멀리 다니는 이유는 가까운 교회 다니면 사람들이 제 사는 모습을 볼까봐 일부러 멀리 갑니다.” 그 말을 듣고 웃었지만 웬지 가슴에 오랫동안 남았습니다. 가까이 있으면 자기 사는 모습이 보일테니까 그것이 싫어 아무도 모르는 데로 간다. 이해는 되었지만 웬지 씁쓸했습니다.

 

어떻습니까? 오늘날 우리 신앙생활의 가장 큰 문제는 확신과 열절이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대한 지식도 없습니다. 어떤 교회에서 교사들을 대상으로 세미나가 열렸답니다. 강사가 강의하다가 물었습니다. “여리고는 누가 무너 뜨렸죠?” 했더니 앞에 앉아 있던 부장 선생님이 깜짝 놀라며 말합니다. “나는 안 그랬는 데 누가 그랬나?”. 그러면서 옆에 있는 김집사님께 물었습니다. “김집사님이 그랬어요?” 그랬더니 김집사가 역시 놀라며 말합니다. “부장님, 저는 절대 그런 짓 할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 반에 철수라는 애가 있는 데 혹시 걔가 그랬을지 모릅니다. 제가 주의를 주겠습니다”. 그러더랍니다. 이렇게 성경을 모릅니다.

 

어떤 교회에서도 그런 일도 있었답니다. 목사님이 교인들에게 물었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무슨 일을 했어요?” 했더니 제일 앞에 앉은 집사님이 큰 소리로 소리쳤습니다. “장사요”. 목사님이 하도 어이가 없어 물었습니다. “장사요? 예수님이 물건을 팔았다는 말이죠?” 했더니 집사가 말합니다. “그래요. 사도신경에 보면 예수님이 장사한 지 3일만에 부활했다고 되어 있잖아요?”. 이렇게 모릅니다. 문제는 몰라도 더 알려고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 이럴까? 그 이유가 무엇일까? 깊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현대인은 깊이 들어가는 것을 싫어합니다. 뭘 깊이 알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깊이 알려면 더 많이 노력하고 더 많이 시간을 내야 하는 데 그것이 싫습니다. 성도간의 교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불가근, 불가원”, “가깝지도 않고 멀지도 않게 지내는 것이 지혜롭다고 생각합니다. 깊이 들어가다 내가 몰라도 될 것을 알까봐 혹시 내가 실망할까 봐 아예 들어가지 않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문제는 뿌리의 문제입니다. 겉으로 나타난 나무의 문제가 아니라 속에 숨겨진 뿌리의 문제입니다. 몇 년 전 우리 교회 마당에도 느티나무를 심었습니다. 조금 파릇 파릇하더니 거울부터 죽어 갑니다. 그래서 뽑고 다시 심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죽습니다. 그래서 땅을 파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땅속에 돌멩이, 비닐 이런 것들이 있어서 배수가 안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땅을 파고 좋은 흙으로 갈아 주고 다시 심었습니다. 그때부터 잘 자랍니다. 성경은 요셉을 무성한 가지, 그 가지가 담을 넘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담을 넘었을까 하고 성경을 찾아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49:22,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요셉의 가지가 담을 넘은 것은 샘곁에 심겼기 때문입니다. 나무의 종자가 달랐기 때문이 아닙니다. 담을 타고 넘는 재주가 있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샘곁에 심겨 물을 빨아 들였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뿌리가 든든했습니다. 뿌리에서 계속 물의 공급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담을 넘은 것입니다. 성경은 또 복있는 사람은 그 모든 행사가 형통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그렇게 되나 보았더니 그 나무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입니다. 1:3, “그는 시냇가애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열매를 맺으며”. 시냇가에 심겼기 때문에 형통한 것입니다. 나무 자체가 대단해서가 아니라 시냇가에 심겼기 때문에. 다시 말하면 뿌리가 든든하게 때문에 거기서 주는 공급으로 잎사귀가 마르지 않고 열매도 맺고 형통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나무도 한번 점검해 볼까요? 우리의 나무도 뿌리를 잘 내리고 있습니까? 그런 관점에서 오늘 말씀 골2:6-7을 같이 읽겠습니다. 2:6-7,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정말 여러분은 예수님께 깊히 뿌리를 내려 풍성한 열매도 맺고 담도 뛰어넘는 큰 나무, 큰 숲을 꿈꿉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몇 가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먼저 깊이 내려가야 합니다.

열매맺는 나무가 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깊히 뿌리를 내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무가 깊히 뿌리를 내리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은 물론, 위험하기 까지 합니다. 바람불면 날아가기 때문입니다. 좋은 나무, 큰 나무, 열매맺는 나무의 첫 번째 조건은 깊히 뿌리를 내리는 것입니다. 재작년에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을 갔습니다. 그런데 그 학교에 엄청난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습니다(사진1). 너무 우람하고 아름다운 나무였습니다. 안내자의 설명에 의하면 이 나무가 그렇게 된 것은 거기서 2-300미터 근처에 강이 흐르는 데 나무가 그 강까지 뿌리를 뻗었다는 것입니다. 뿌리가 깊히 뻗어 강가에 뿌리를 내렸으니 그 나무는 시들지 않고 수백년을 아주 큰 나무로 거기 서 있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깊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저는 2002, 1월에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그래서 병원에 입원했는데 병원에 입원해서 받은 가장 큰 은혜는 저 자신의 깊은 곳을 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처음에 교통사고 당하고 병원에 있으면 오히려 기도도 많이 하고 하나님과 깊은 교제가 시작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습니다. 온 몸이 쑤시고 몸을 가누지 못하는 상황에서 제 마음은 기쁘고 감사하기는커녕 온갖 걱정과 불안으로 가득찼습니다. 사람들앞에서는 다 하나님의 은혜지요했지만 사람들이 돌아가면 제 마음은 온갖 무기력외로움으로 가득찼습니다. 간병인 없이는 아무 것도 못하는 무기력, 이러다가 병신 되는 것 아닌가 하는 두려움, 혹시 내가 하나님께 버림받지 않았나 더 이상 목회도 못하는 것도 아닌가 하는 불안한 감정이 저를 짓눌렀습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시편을 읽었습니다. 130:1, “내가 깊은 곳에서 부르짖나이다”. 이 말씀속에 깊은 곳이란 단어에 제 눈길이 갔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깊은 곳은 곧 제가 처한 상황이었습니다. 병원에 입원하고 무기력과 소외감속에 하루 하루를 보내는 저 자신, 저는 제가 그렇게 깊은 곳에 뗠어질 줄은 몰랐습니다. 그 깊은 곳에서 저는 애타게 부르짖고 있었습니다. “부르짖는다는 이 말은 히브리어로 짜아크입니다. 이 말은 애굽에서 학대받던 이스라엘 백성이 부르짖었던 것과 같은 단어입니다.

 

그때부터 저는 병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병원에 심방가면 목사님, 괜찮아요. 곧 나을 거예요라도 말하며 애써 자신을 위로하는 사람들의 말을 믿지 않게 되었습니다. 웃음뒤에 숨은 그들의 공허한 외로움을 보았습니다. 말은 그렇게 해도 그들은 모두 깊은 곳에서 짜르크”, 탄식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사람 하나를 이해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아십니까? 단순히 아프세요? 힘드시죠? 하고 말 것이 아닙니다. 속을 들여다 보아야 합니다.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사람의 겉모습이 그 사람이 아니라 속모습이 그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떨까요? 하나님도 간단한 분이 아닙니다. 며칠 새벽기도 해보고 내가 하나님 있다 없다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몇 달 성경공부 해보고 내가 하나님을 다 알았다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영어와 수학에는 완전정복이 있지만 하나님에게는 완전정복이 없습니다. 성경이 하나님에 대하여 묘사한 내용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아주 높은 곳에 계십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성경의 하나님은 언제나 높은 곳에 계십니다. 그는 높이 들린 보좌에 홀로 앉아 계십니다. 55:9,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그는 또한 우리와 멀리 계십니다. 딤전6:17,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그는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먼 당신입니다. 그 분이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는다면 우리가 그 분에게 가까이 갈 수는 없는 분입니다. 그리고 아주 깊은 곳에 계십니다. 11: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그는 깊은 곳에 계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보다 높이, 멀리, 그리고 깊히 계신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쉽게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34박 세미나로 성경을 다 알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한 주간 부흥회로 하나님을 다 만날 수도 없습니다. 이것들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쉬지 말고 더 그렇게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나무가 잘 자라기 위해 뿌리를 뻗듯이 우리도 깊이 하나님께 뿌리를 뻗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자격증은 1년만에 마칠 수 있고 군대는 2년이면 제대하고 대학은 4년만에 졸업하지만 하나님은 1년만에 마스터되지도 2년만에 제대되거나 4년만에 졸업되지도 않습니다. 신앙은 그 이상 걸리는 그 평생에 걸친 구도의 길입니다. 오래 그리고 깊이 뿌리를 내리십시오. 이 정도면 됐다고 자만하지 마십시오. 자만이 가장 큰 병입니다. 늘 초신자의 자세로 새로 시작하십시오. 뿌리를 깊히 내려야 합니다. 뿌리를 뻗을수록 우리의 나무는 크고 아름답습니다.

 

예수님께 뿌리를 내리십시요

그러나 우리가 뿌리를 깊이 내려야 하지만 아무 데나 깊이 내려서는 안됩니다. 6절을 보시겠습니까? 2:6,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여기에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예수님이 우리가 뿌리를 내릴 토양입니다. 7절을 또 보세요.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여기서 가 누구입니까? 예수님입니다. 뿌리를 깊이 내리되 아무 데나 내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내려야 합니다.

 

이스라엘에는 과일이 많습니다. 포도, 올리브, 무화과가 맛있지만 특히 오렌지가 맛있습니다. 그런데 같은 오렌지도 땅에 따라 크기와 맛이 다릅니다. 텔아비브, 욥바같은 지중해 지역에서는 크고 맛있습니다. 땅이 좋고 물이 좋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다 광야에서는 꼭 한국의 탱자같은 오렌지가 열립니다. 품종도 같고 모양도 같지만 땅이 문제입니다. 어디에 뿌리를 내렸느냐가 문제입니다. 광야는 땅이 딱딱해서 뿌리를 깊히 내릴 수도 없지만 혹시 내려도 맛있는 열매가 나오지 않습니다. 토양에 수분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차이가 납니다. 이것은 르호봇 지역에 심긴 오렌지입니다(사진2). 이것은 유다광야 척박한 땅에 심긴 오렌지입니다(사진3). 종자는 같습니다. 그런데 전혀 다른 열매가 나옵니다.

 

, 우리안에 하나님의 생명의 씨가 있습니다. 어디에 심겠습니까? 어디에 뿌리를 내리겠습니까? 예수님에게 뿌리를 박는다는 말은 우리 삶의 모든 근거와 목적을 예수님께 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삶의 옳고 그름의 근거가 예수님에게 있습니다. 우리 삶의 모든 소망과 꿈과 목표가 예수님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사는 이유는 예수님이 그렇게 살았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쉘던이란 사람이 쓴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했겠는가?”입니다(사진4). 이 책은 우리의 생각과 행동의 근거가 오로지 예수님에게 있음을 강조한 책입니다. 물론 우리가 예수님이 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과 똑같이 되는 것이 우리의 목적도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면서 늘 물어야 할 질문은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했겠는가?”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삶의 표준이 되고 판단의 근거가 되어야 합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간신히 직장에 취직했는 데 까다로운 상관을 만났습니다. 마음 고생이 이만 저만이 아니라 회사를 그만 둘까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그가 할 일은 우선 그만 두고 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했겠는가 묻는 것입니다. ” 가정에서 어느날 사소한 일로 아내와 다투었습니다. 그리고 화가 나서 집을 나갔습니다. ”다시는 집에 들어오나 봐라“. 큰 소리쳤습니다. 그러나 막상 집을 나갔는 데 갈데가 없습니다. 할 수 없이 아무도 안보는 술집에 들어가서 소주 한병을 마셨습니다. 시간은 점점 12시가 가까워 오는 데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합니다. 그때 누가 떠오릅니까? 아내입니까? 술친구입니까? 예수님입니까? 그때 예수님이 떠오른 사람이 예수믿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묻는 사람입니다. 만일 그때 예수님을 떠올리지 않고 에이, 될대로 되라했다면 그는 2, 3차 술집으로 가서 결국 사고를 치게 되어 있습니다. 자녀가 원하는 대학에 못 들어갔을 때 어떻게 하나요? 사업이 안될 때 어떻게 하나요? 교회에서 누구 때문에 시험들고 에이. 교회 안 나올까?“할 때 어떻게 하나요? 교회에서 이런 저런 봉사를 부탁받았을 때 어떻게 하나요?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할 때 어떻게 하나요?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묻고 또 물어야 합니다. 언젠가 T.V을 보니까 어떤 사람이 점을 잘 보러 간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사람이 교회에도 다닌다는 것이었습니다. 결단코 말합니다. 그 사람 교인 아닙니다. 교인이란 교회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의 삶의 가치가 되고 목적이 되고 판단의 근거가 되는 사람입니다.

 

2차 대전때 독일이 히틀러가 6백만의 유대인을 학살했습니다. 그때 의연히 일어나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소리치다가 붙잡혀 사형당한 목사님이 계십니다. 본회퍼 목사님입니다(사진5).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상황에서 그가 예수님께 물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예수님이라면 이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랬더니 예수님이라면 과감하게 정의편에 섰을 것이라고 믿어졌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라고 한 대로 저항했고 그 결과 붙잡혀 순교했습니다. 같은 감옥에 있었던 그의 동료가 그의 마지막 장면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사형장으로 끌려가 교수대에 서기 직전, 그는 간수에게 부탁합니다. “나에게 마지막 기도할 수 있는 시간을 주십시오”. 허락을 받은 그가 단정히 무릎을 단정히 꿇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얼마나 간절히 기도하는지 간수도 고개를 숙일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눈을 뜨더니 간수에게 말합니다. “오늘 여기에서 나의 마지막 날이 내일 천국에서 첫날입니다”.

 

그때 그의 얼굴은 해처럼 밝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죽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까? 그의 저항, 그의 기도, 그의 천국에 대한 소망이 모두 예수님 모습을 닮지 않았습니까?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항상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묻고 물었기 때문입니다. 물어야 해답이 대나옵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사랑하며 평소에 가졌던 세 가지 믿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 통하여, 예수님안에서”. (다같이).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예수님 때문에 고난을 참습니까?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께 기도합니까? 예수님안에서 성도와 하나 됩니까? 내 의지로 하나됩니까? 예수님 때문에 형제를 사랑합니까? 예수님을 통해 성경을 봅니까? 예수님안에서 세상과 화해합니까?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 통하여, 예수님안에서”. “예수님 때문에 형제를 사랑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자매를 사랑합니다. 예수님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예수님 통하여 성령으로 기도합니다. 예수님안에서 이웃을 사랑합니다. 예수님안에서 하나님께 헌신합니다”. 모든 비밀은 예수님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골1:27을 좋아합니다.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예수님이 우리의 비밀이요 영광이요 소망입니다. 그가 우리가 딛고 선 반석이요 그가 우리가 매일 바라볼 빛나는 새벽별이며 그가 우리를 인도할 선한 목자입니다“.

영양분을 공급받으십시요

그렇게 해서 예수님께 뿌리를 내렸다면 세 번째가 있습니다. 그것은 뿌리로부터 영양분을 공급받는 것입니다. 7절 보십시오. 2:7,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다같이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대로”. 뿌리를 깊히 박아야 하는 이유는 현실적인 이유 때문입니다. 영양분을 공급받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식물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네 가지를 공급해야 한다는 것은 이미 압니다. 그것이 질소, 석회, 인산, 칼륨입니다. 식물학자에 의하면 이 네 가지가 흙속에 충분히 있는 한 식물의 성장은 자동적으로 일어납니다. 학자들이 실험을 해 보았습니다. 이 네 가지중 한 가지만 집중적으로 공급했습니다. 그랬더니 식물이 쑥 자랐습니다. 그러나 웬만큼 자라다가 성장이 뚝 멈췄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요소가 공급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느 만큼 자랄까요? 이것을 최소치의 원리라고 합니다. 네 가지중 가장 적게 공급되는 것만큼 자랍니다. 통의 원리와 같습니다. 나무로 만든 통의 경우에 물이 가장 낮은 나무만큼 찹니다(사진6). 다 좋은 데 나무 하나가 낮으면 물은 거기까지 밖에는 차지 않습니다. 그래서 질소, 석회, 인산, 칼륨, 이 네 가지가 균형있게 공급될 때 잘 자랍니다.

식물이 그렇다면 영적 생명도 어떨까요? 우리의 영적 나무도 성장의 요소가 있습니다. 성장이란 말을 영어로 GROW라고 합니다. “자란다, 성장한다는 뜻입니다. 네 글자로 된 영어 GROW는 영적 성장의 네 가지 요소를 말해 줍니다.

 

첫째 G입니다. Go to God.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성장의 첫 번째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뿌리를 내린다는 것은 날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간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RRead the Bible,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간다는 말은 그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때로 같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같아야 합니다. 눈으로는 성경을 읽되 마음으로 그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세 번째는 O, Obey the Word of God. 하나님의 말씀을 복종하는 것입니다. 복종하지 않으면 들으나 마나 소용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이유는 복종하기 위해서입니다. 마지막 W, Walk with Jesus, 예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순종하면 당연히 예수님과 동행하게 됩니다.

 

요즘 제가 아침 Q.T는 구약의 아가서를 하는 데 아가서를 읽다가 이 네 가지를 함께 기록한 말씀을 읽었습니다. 아가서 3:1-4절입니다. “내가 밤에 침상에서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찾았구나 찾아도 발견치 못하였구나. 이에 내가 일어나서 성중으로 돌아다니며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거리에서나 큰 길에서나 찾으리라 하고 찾으나 만나지 못하였구나. 성안을 순찰하는 자들을 만나서 묻기를 내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너희가 보았느냐 하고 그들을 떠나자마자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만나서 그를 붙잡고 내 어미 집으로, 나를 잉태한 자의 방으로 가기까지 놓지 아니하였노라”. 아가서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의 관계로 봅니다. 신랑과 신부는 인간이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최고의 관계입니다.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3:1, “내가 밤에 침상에서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를 찾았노라”. 여러분, 사랑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찾는 것입니다. 사랑은 찾을 때까지 찾는 것입니다. 찾아야 사랑이며 찾아져야 사랑입니다. 어떻게 찾을까요? 1, “내가 밤에 침상에서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를 찾았노라”. 밤마다 찾고 마음으로 찾습니다. 이것이 Go to God.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고 성장은 날마다 나아갈 때 옵니다. 그나마 대충 나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2절 보세요. 3:2, “내가 일어나서 성 안을 돌아다니며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거리에서나 큰 길에서나 찾으리라 하고 찾으나 만나지 못하였노라”. 신부는 더 이상 앉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벌떡 일어납니다. 그리고 미친 사람처럼 성안을 돌아다닙니다. 그렇게 해도 못날 때도 있습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못 만나도 찾으러 가는 사랑, 그것이 또한 믿음입니다. 어떻습니까? 이 아름다운 3월에 여러분은 Go to God. 하나님께 나아갑니까? “왕되신 주 앞에 나 경배합니다. 주님만 찬양받기 합당하시니 큰 존귀와 영광 홀로 받으소서. 오 주 앞에 나아갑니다”(찬양). Go to God.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 그것이 성장의 첫 번째, 영적 영양분을 공급받는 첫 번째 길입니다.

 

3절을 보면 신부가 한 사람을 만납니다. 3:3, “성중의 행순하는 자들을 만나서 묻기를 내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너희가 보았느냐 하고”. 순찰자들입니다. 밤이 새도록 신랑을 찾은 신부가 신랑을 찾지 못해 주저 앉아 있을 때 한 사람이 나타납니다. 성안을 순찰하는 순찰자입니다. 그러자 그에게 다가가 신부가 묻습니다. “내 사랑하는 자를 보았느냐“. 그러자 그가 신랑이 어디 있는가 말해 줍니다. 이 순찰자가 누구입니까? 성경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하나님께, 예수님께 나가는 길을 인도하는 안내자입니다. 그리고 그 성경을 풀어주는 분이 성령님입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고 성령의 감동을 받은 성경은 우리를 하나님께 인도합니다.

 

이 순찰자는 또한 우리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사도, 교부, 목회자, 영적 지도자이기도 합니다. 그들의 도움과 안내를 잘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신부가 순찰자를 만나 신랑을 찾았지만 순찰자가 신부를 찾아 신랑을 만나게도 했습니다. 찾고 찾아졌습니다. 신부가 신랑을 찾은 것이 아니라 신랑이 신부를 찾은 것입니다. 누가 누구를 찾은 것이 맞습니까? 우리가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찾는 것이 맞습니까?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 우리를 찾은 것이 맞습니까? 두 가지 다 맞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찾고 또 찾아졌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발견하고 또 발견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붙잡고 또 붙잡혔습니다. 그 찾고 붙잡은 것 사이에 성경이 있습니다. 우리가 Read the Bible, 성경을 읽을 때 우리가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러나 Obey the Word of God,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찾아집니다. 우리가 성경공부할 때 하나님을 발견합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발견됩니다.

 

마지막 장면을 보시겠습니까? 4절입니다. 3:4, “그들을 떠나자마자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만나서 그를 붙잡고 내 어미 집으로, 나를 잉태한 자의 방으로 가기까지 놓지 아니하였노라”. “지나치자마자했습니다. 이 말은 신부가 순찰자의 도움을 받자 마자 신랑을 만났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지나치자 마자했으니 그 순찰자에게 오래 머물지는 않았다는 말입니다. 신부는 누구와 함께 오래 머물렀습니까? 4,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만나 그를 붙잡고”, 다같이 그를 붙잡고”, “는 신랑입니다. 순찰자는 지나치고 신랑은 붙잡은 것입니다. 붙잡고 어떻게 했습니까? “그를 붙잡고 내 어머니 집으로, 나를 잉태한 이의 방으로 가기까지 놓지 아니하였노라”.

 

이것입니다. 이것이 영적인 삶입니다. 영적인 삶은 이벤트가 아닙니다. 한 두 번의 노력이 아닙니다. 그것은 신랑을 붙잡고 놓치지 않으면서 어머니의 집에서 영원토록 그와 동행하는 것입니다. 과거의 교회는 이 어머니의 집을 교회로 해석했습니다. 교회는 신자의 어머니이기 때문에 당연히 교회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신랑이신 예수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만이 아닙니다. “나를 잉태한 자의 방입니다. 잉태하는 이는 하나님, 곧 하나님의 품입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품이 아닌 데가 어디 있습니까? 이 세상 어디에서나 신랑이신 예수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Walk with Jesus, 예수님과 동행하는 길, 그것이 영적 양분을 공급받고 성장하는 길입니다.

 

만물이 소생하는 3, 여러분은 예수님께 뿌리를 내렸습니까? 예수님이 여러분의 삶의 근거요 기준이요 표준이며 목표입니까? 그 예수님께 깊히 뿌리를 내렸습니까? 날마다 Go to God. 하나님께 나아가고 Read the Bible, 성경을 읽으며 Obey the Word of God. 하나님의 말씀을 복종하며 신랑이신 예수님을 붙잡고 놓치 않으면서 어머니 교회에서 세상에서 Walk with Jesus, 예수님과 동행합니까? 그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2:6-7 2013.3.3()

예수님께 뿌리내리기

49:22,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1: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열매를 맺으며”.

2:6-7,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먼저 깊이 내려가야 합니다.

 

케임브리지대학 나무(사진1).

 

130:1, “내가 깊은 곳에서 부르짖나이다”.

55:9,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딤전6:17,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11: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예수님께 뿌리를 내리십시요

2:6,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르호봇 오렌지(사진2).

유다광야 오렌지(사진3).

 

쉘던,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했겠는가?”(사진4).

 

본회퍼 목사님(사진5).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 통하여, 예수님안에서”(본회퍼)

 

1:27,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영양분을 공급받으십시요

2:7,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최소치의 통(사진6).

 

GROW

(1) G. Go to God.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

(2) R. Read the Bible, 성경을 읽는 것

(3) O, Obey the Word of God.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

(4) W, Walk with Jesus, 예수님과 동행하는 것

 

아가 3:1-4, “내가 밤에 침상에서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찾았구나 찾아도 발견치 못하였구나. 이에 내가 일어나서 성중으로 돌아다니며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거리에서나 큰 길에서나 찾으리라 하고 찾으나 만나지 못하였구나. 성안을 순찰하는 자들을 만나서 묻기를 내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너희가 보았느냐 하고 그들을 떠나자마자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만나서 그를 붙잡고 내 어미 집으로, 나를 잉태한 자의 방으로 가기까지 놓지 아니하였노라”.

 

3:1, “내가 밤에 침상에서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를 찾았노라”.

 

왕되신 주 앞에 나 경배합니다. 주님만 찬양받기 합당하시니 큰 존귀와 영광 홀로 받으소서. 오 주 앞에 나아갑니다”(찬양).

 

3:3, “성중의 행순하는 자들을 만나서 묻기를 내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너희가 보았느냐 하고”.

 

3:4, “그들을 떠나자마자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만나서 그를 붙잡고 내 어미 집으로, 나를 잉태한 자의 방으로 가기까지 놓지 아니하였노라”.